국가를 시민사회 위에 독립된 존재로 상정하는 순간, 사회혁신을 상상할 수도, 수행할 수도 없다. 사회혁신은 정부혁신의 철학이고 방법론이지 그 하위개념, 단위 아이템이 아니다. 구름처럼 태양처럼 하늘 위 존재로 국가를 우러러 보는 한, 정치는 늘 권력 쟁취전이 되고, 모든 문제는 나랏님 탓, 대통령 탓이 된다. 국가는 모든 문제의 시작이자 끝이 된다. 위기는 그렇게 반복된다.
87년 노동조합설립운동이 마침내 한진촛불로 진화했다. 한진이 바뀌고, 삼성이 바뀌고, 현대가 바뀌고, 롯데, 엘지, 에스케이가 바뀌어 코먼웰스 기업으로 거듭날 수 있다면 대한민국은 세계사의 진짜 민주주의를 쓰게 된다. 국민이 이들 기업의 성공을 돕는 진짜 대주주다. 더더욱 승승장구 할 것이다. 역설적으로... 부정적으로만 읽히던 사회 전 영역의 국가주도성, 초집중의 재벌경제를 가진 한국만이 가능한 시나리오다.
사회혁신을 마치 슬로우푸드처럼 추진해야 한다는 이들이 있다. 더 낮은 곳, 더 작은 것부터, 더 많은 시행착오와 숙성을 거쳐야 하는, 어디가 시작이고 어디서 끝내야할 지도 모를 일이 이들에겐 사회혁신이다. 이들에게 사회혁신은 시민사회 운동을 정부가 수용하는 과정에 불과하다. 그 정성을 모르는 바 아니지만 동의하기 어렵다.
로컬리즘은 권력을 '나누지' 않는다. 지방이라는 이유로 소외되어 있던 권력의 주체들에 제 위상을 찾아주고 문제 해결의 당사자로 호명하는 과정이 로컬리즘일 뿐이다. 지방분권은 작은 권한, 봉토(封土)를 나누어 갖고 저마다의 성을 쌓는 권리를 주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규모만 다를 뿐 또다른 중앙집권주의이다. 핵심은 ‘권한’을 나누는 데 있지 않고 ‘권력의 성격’을 바꾸는 데 있다.
가치중심의 정부운영을 일회적 선언이 아니라 헌법적 목표로 격상시키지 못할 이유가 없다. 이번 개헌은 무너진 공공부문의 공적 가치를 되찾는 것이 최우선 목표니 더욱 그러하다. 단골 이슈들 외에, 촛불이 웅변한 내용 하나는 들어가야 개헌의 뜻이 살아나지 않을까?
5월 29일에 영면하신 로빈 머레이 선생님의 장례식이 지난 지난 6월 19일, 선생님의 댁이 있던 런던 해크니의 올세인트 교회(All Saints Church, Haggerston)에서 열렸습니다. 선생님 일생 구비구비에서 함께 했던 많은 동료, 친구, 가족들이 모여 선생님과의 시간을 추억했고, 선생님이 일궈내었던 여러 사회 변화를 돌이켜보고 함께 축하하는 자리이기도 하였습니다.
트럼프는 부자다. 그 부의 원천이 부동산이었다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그러나 지금 누구나 인정하듯 미국을 떠받치고 있는 것은 IT산업이다. 애플과 구글 아마존 페이스북이다. 이들이 트럼프의 무슬림입국금지 조치를 가장 선명하게 반대하고 있다. 중동이 불안할 수록 우수한 두뇌를 수혈받은 IT는 이득이었다. 땅짚고 헤엄쳤던 땅부자는 거기까지 셈할 이유가 없다.
세계화 반대도 맞고, 런던의 독주에 대한 견제도 맞고, 정치 엘리트들에 대한 반란도 맞다. 그러나 EU탈퇴로 제일 고통을 받을 사람들이 또한 그들 취약한 계층 자신들일 것이다. 유럽연합은 세계화의 주범도 종범도 아닌 그냥 프레임웍에 불과하다. 그 안을 어떻게 구성하고 어떤 가치와 내용으로 채울 지는 민주주의가 풀어나가야 할 숙제였을 뿐이다.
사회혁신은 ‘사회(Society)’의 혁신이 아니다. 실질적이고 실천적인 문제해결 역량을 추구하기 때문에 사회혁신은, 지금까지 시스템이 구축해 놓은 것들의 새로운 조합 또는 그 ‘경계 밖’에서 작동할 수 있어야 한다. 기성의 권위와 위계를 뛰어넘는 ‘소통과 협력’이 없다면 불가능한 작전이다. 그래서 ‘소셜(Social)’혁신이다.
인구 800만이 넘는,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도시 중의 하나인 영국 런던의 시장에 버스운전사 출신 파키스탄 이민자를 아버지로 둔, 사립학교는 꿈도 못꾼, 옥스브릿지 대학 출신도 아닌, 평범하기 짝이 없는... 무슬림이 당선 되었다. 이게 런던 이다. 지금 무슬림 국가 밖에서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 곳은 런던이 유일하지 않을까 싶다.
여야를 막론하고 '성공한' 정치인들과 자신이 같은 꿈을 꾸고, 같은 가치를 공유하지 않는다는, 그리 새로울 것은 없지만 곤혹스런 사실이다. 노동당 스스로도 마찬가지다. 그들이 목표하는 것이 지금 보수당의 위치를 대체하는 데 있지 않다는 사실, 그런 정치기술자에 머무는 건 정말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 일이라는 사실, 스스로 대안이 아닌 줄 알면서도 정답인 양 포장하거나 끊임 없이 정치적 타협을 강요 당하는 현실...
큼직큼직한 사각형의 건물들과 붉은 벽돌, 그 사이를 흐르는 시커먼 운하는 산업시대의 감각을 불러일으키기 충분하다. 도심을 가로지르는 노란색 노면기차(tram)는 시대물 셋트장을 운행하는 궤도열차 같다. 산업혁명과 자본주의의 밑바닥을 가장 먼저 발견한 도시, 협동의 가치와 생산성을 증명한 도시, 시대의 주류와 대안이 공존하는 영국 문명의 적통이 이곳이다.
영국 전체로 따지면 7%의 아이들이 연간 최소 17,000파운드(약 3천만원)에 이르는 학비를 내는 사립학교를 다닌다. 그 7%의 특권적 아이들 중 마이클의 용기와 당당함을 가지고 있는 아이들이 얼마나 될까? 20년 전 스티브 베이커를 면접했던 학부모 이사 데비(Debbie MacLeod)는 자신의 아이들이 모두 졸업하고 떠난 뒤에도 지역사회 일원으로 학교재단 이사회 의장을 맡고 있다.
런던의 유명한 건축비평가 이안 넌(Ian Nairn)은 위캄 백화점 건물을 일컬어 'one of the best visual jokes in London(런던 최고의 익살스런 건축)' 이라 했다. 자칫 런던 변두리의 아류에 불과했을 건축에 스피겔할터는 생명력 있는 스토리를 새겨 주었다. 어떤 이는 '의도하지 않은 천재성'이라 하고 또 어떤 이는 '모순에 가득찬 인간성을 비추는 거울' 같은 것이라 칭송한다. 모두 맞는 말이다.
영국에서는 보수당 조차, 'We are the party of working people (일하는 사람들의 정당)'이라는 메니페스토를 앞세우고 선거에 임한다. 일하는 사람들의(of) 정치는 원래, 일하는 사람들에 의한(by) 정치다. 보수당의 공언이 비록 구호에 불과하다 하더라도 40대 중반의 그들이 왕성하게 일하는 모습을 보면 그들 스스로 '일하는 사람들' 임에는 반론의 여지가 없다. 그들은 '정치'라는 일을 정말 열심히 한다.
사실 사전 준비 단계를 철저히하고 투명하게 해서 좋지 않은 일이 어디 있겠는가? 영국에 '사회적가치법'이 도입된 것은 최근이지만 사실 영국의 행정은 이미 오래 전부터 각 정부 수준에서 그런 절차를 지켜왔다고 보는게 맞을 것이다. 그게 소모적 갈등도 없애고, 예산도 줄일 수 있는 민주적 방식임을 경험으로 안다. 물론 한국도 몰라서 못하는게 아닐 것이다. 알면서 반복하는 이유도 있을 것이다.
'나쁜' 보수는 '미숙한' 진보에 기생한다. 진보의 '저항' 정치가 국민의 선택으로 이어지기는 커녕 극우 세력에게 떡밥만 던져준다면 그것만큼 어리석은 일도 없다... 문제는 저항(protest)이 아니라 대안(alternative)이다. 그리고 그 대안은 현실에서 제대로 '작동(work)'하는 것이어야 한다. 진지하고 현실적인 보수주의자들이 많아야 하는 이유다.
앤드류와의 인터뷰 중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굴벤키언 재단의 파트너들에 대한 철학과 태도이다. 흔히 펀더(funder)와 펀디(fundee)로 정의되는 수직적인 관계가 아닌 새로운 사회를 만들어가는 파트너(partner) 또는 이들간의 협력의 극대화를 위한 조력자로서 재단의 역할을 분명히 하는 것이다. 프로젝트 지원 자금줄을 쥐고 있는 스폰서로서 프로젝트의 방향과 목표를 좌지우지하는 모습은 찾아볼 수 없다.
한국이나 영국이나 정치인에 대한 불신은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러한 '정치인'에 대한 불신이 ‘정치’에 대한 무관심으로 이어지지 않도록 근본적인 질문을 제시함으로써 정치와 대중을 연결하고 견인하는 것, 그것이 언론의 역할이다. 한마디로, 지체와 작동불능에 빠진 정치를 더 활성화해야 한다는 것이 BBC 파노라마의 4부작 특집 "What Britain Wants(영국이 원하는 것들)"이 던지는 메시지다.
영국 런던의 람베스구(Lambeth Council)는 2010년부터 협동조합형 지자체(Co-operative Council)로 전환을 선언하고 지난 연말, 수년에 걸친 조직개편 작업을 마무리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