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 초 영국 총선에서 보수당 승리가 확정된 뒤, David Cameron 총리가 새 내각을 구성하는 데 걸린 시간, 단 4일 이었다. 예상 밖의 단독정부라는 점을 감안하면 속전속결이다. 한국의 선거 전후의 혼란상과 비교하면 이들의 업무 효율성과 연속성은 그저 놀라울 뿐이다. 그리고 그 내각 구성원의 면면을 들여다보면 더 재밌다. 국무위원급 장관(물론 이들은 모두 국회의원이다.) 30명 중 18명이 70년생을 전후한 40대 중반이다. 분명한 과반이다. 외교(59세) 국방(62세)을 제외하고 50대 중반도 거의 없다. 제일 젊은 이는 행정부문 Matthew Hancock으로, 78년생 36살이다. David Cameron 총리는 66년생(49세), 그는 지난 정부에 44세로 총리에 올랐고 이번에 임기를 마치면 당대표를 후임에게 물려주겠다고 공언했다. 다시 돌아올 여지가 없는 건 아니지만 54살에 리더십 은퇴를 선언하는 것이다. 정권의 2인자 재무장관 George Osborne 은 지금 44세(71년생)다. 

보수당 뿐 아니다. 오늘 영국의 정치를 주도하는 이들은 모두 40대다. 스코틀랜드에서 압도적인 승리를 거둔 Nicola Sturgeon 스코틀랜드 수상(SNP 당수)은 70년생(45세)이다. 실패한 Ed Miliband 노동당 당수도 69년생(46세)이었다. 평균으로 치면 한국의 정치인들보다 거의 15년이 젊다. 물론 지금 박근혜 정부 국무위원들 보다는 평균 20년 가까이 '어리다'. 직전 비서실장 김기춘은 39년생(76세), 이병기 현 비서실장 47년생(68세), 황우여 교육부총리 47년생(68세), 최경환 경제부총리 54년생(61세)이다. 며칠 전 지명받은 57년생(58세) 황교안 국무총리 후보보다 나이가 적은 사람은 통일부 홍용표(64년생) 여성가족부 김희정(71년생) 두 사람 뿐인 것도 특이하다. 아마 내년 선거 앞두고 부총리들부터 줄줄이 사표를 던지고 나갈 것이다. 정치인으로는 새누리당 김무성 대표 51년생(64세), 새정치민주연합 문재인 대표 53년생(62세), 이종걸 원내대표 57년생(58세) 그리고 유승민 새누리당 원내대표가 가장 어린(?) 58년생(57세)이다. 오래된 나라 영국보다 젊은 국가 대한민국의 정치인이 실제 더 늙었고 보수의 새누리당 보다 진보를 내세우는 새정치민주연합의 의원들이 더 늙었다. 미국의 Bill Clinton과 Barack Obama, 이들도 모두 47세에 처음 대통령이 되었다. 왜 이런 차이가 나는 것일까?

신영복의 [담론]에는 이런 내용이 나온다. ‘명필은 장수(長壽)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에 의하면, ‘오래사는 것만큼 세상을 달관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 ‘산전수전을 다 겪어서 사물과 인간에 대한 무르익은 생각이 바탕에 깔려 있어야 훌륭한 글씨를 쓸 수 있다.’ 그는 이를 서도(書道)의 미학이 ‘형식미’에 국한되지 않는 ’관계론’이기 때문에 그러하다고 말한다. 그래서 한 폭의 글씨에는 ‘실패와 사과와 감사 등 파란만장한 인생사가 담긴다.’고 말한다. 정치도 그래서일까? 한국의 정치만 보면 정치가 곧 서도(書道)인 듯 하다. 요즘 김종필 회고록을 연재하고 있는 중앙일보를 읽는 독자라면 이해가 쉬울 것이다. 과연 달관(達觀)의 김종필이다. 야권엔 박지원도 있다. 노회(老獪)한 언행으로 여론을 호도하고 감방을 제 집 드나들듯 제도의 부실을 타고 넘는 기술이, 그들에게는 교양(敎養)이다. 그러나 정치는 서도가 아니다. 더구나 대한민국 정치인의 평균 나이인 60 언저리는 소위 사회적 정년(停年)으로, 자칫 노욕이 치받을 수 있는 때지 달관할 수준에는 미치지 못하는 나이이기도 하다. 청문회에 선 장관 후보들을 보면서 늘 느끼는 바가 그와 같다. 

Photo by K.Ah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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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영국의 집권 그룹이 언제나 40대 였던 것은 아니다. 1950년대의 Churchill 은 56세에 총리가 됐고, 1979년에 총리에 올라 한 시대를 풍미했던 Margaret Thatcher는 54세에 처음 총리에 올라 세차례 연임을 하고 1990년에 47세의 John Major에게 권좌를 물려주었다. 그러나 그때부터 약 25년 동안, 노동당의 Goden Brown(56세)을 빼면 늘 40대가 정권의 1인자 였다. 특히 정권교체기엔 더 젊어진다. 97년 보수당의 18년 장기집권을 깨고 또다른 노동당(New Labour)을 이끈 Tony Blair는 당시 44세였고 지금 David Cameron이 그 15년의 노동당 정권을 뒤집은 것도 앞서 말했듯이 44세의 같은 나이였다. 우리에게도 몇가지 기억을 떠올리는 것으로 충분하다. 박정희의 쿠데타는 그의 44세 때 일이다. 1971년 김영삼이 40대기수론으로 대통령선거 후보 지명전에 뛰어든 때가 44세, 그 지명전에서 김영삼을 따돌리고 대선에 출마한 김대중 역시 46세에 불과했다. 노무현은 56세에 대통령 선거에 당선되었지만 386의 새파란 참모들에 둘러싸여 있었다. 오히려 30대의 정권이었다 해도 무방하다. 

다시 신영복의 [담론]이야기, 그는 조선 숙종 때 강화학파의 비판담론으로서의 위상을 이야기 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의지하는 이론이 현실과 모순된다는 것을 느끼게 될 때, 우리는 대체로 두 가지의 대응 방식을 취합니다. 첫째 실사구시의 대응 방식입니다... 강화학에서는 이 방식을 ‘물리’ 방식의 대응이라고 합니다. (이에 반해) 강화학에서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진리’ 방식의 대응입니다. 비근한 예로 경제 불황이라는 현실과 경제 이론이 차질을 빚을 때 실사구시적 대응 방식은 현실 경제를 중심으로 '구조조정'에 나서는 것입니다. 반면 진리 방식의 대응은 ‘경제란 무엇인가’ ‘경제는 왜 살려야 하는가?’ 라는 물음을 던지면서 ‘경제’라는 개념의 준거를 재구성 합니다.”

이 글을 읽고 전자를 보수적 현실인식이라 보고 후자를 진보적 사고방식이라 치부한다면 오늘을 제대로 보지 못하는 것이다. 지금은 자본주의 자체가 후자의 문제의식으로 창조적 파괴를 경험하고 있는 중이다. 정확히 국가와 시장, 생산과 소비, 투자와 무역, 분배와 정책, 화폐와 금융 그리고 소유의 구조에 이르기까지 경제 사회에 걸친 모든 것이 새롭게 정의되고 있다. 신영복 식으로 말하자면 지금은 강화학의 열정이 필요한 시대다. 민주주의도 훨씬 더 역동적으로 변했다. 혁신없는 정치의 '지체 현상'은 이제 너무 쉽게 눈에 띈다. 이번 선거에서 영국의 노동당(Labour)이 정작 그들 노동자 계급(working class)의 표를 극우민족주의 정당 UKIP에 내주고 정권탈환에 실패한 것도 그런 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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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한 30년 전 쯤, DJ 시절의 정치에 머물고 있는 한국은 그래서 더 문제다. 이미 정치권에 진입한 과거 운동권, 여전히 저항적 민주주의에만 경도되어 있거나 학연 지연 계파에 줄대기만 바쁘다. 그리고 여야를 막론하고 나머지는 퇴직 공무원의 미래 직장에 불과해 보인다. 이것은 치명적이다. 과연 그들이 새로운 사회 시스템을 소통할 열정과 책임, 창의력을 가지고 있을까? 고위공직자들의 특별한 경험들이 사장(死藏)되는 것은 아까운 일이다. 현실에 맞는 법과 제도를 만드는데 그들의 숙련이 필요한 것도 사실이다. 영국이 상원제도를 유지하고 있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상원에서 그들은 무보수 명예직으로 법안을 심사하고 조언한다. 그러나 영국의 퇴직 공무원, 율사 출신들이 하원의 리더십을 기웃거리지는 않는다. 그들이 지금 왕성하게 일하는 사람들보다 더 '창의적'일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들의 정치가 일하는 사람들을 '위한(for)' 정치를 표방할 수 있을 지는 몰라도 그런 달관(達觀)의 정치는 민주주의가 아니라 귀족정치, 기껏해야 시혜(施惠)의 정치다. 일하는 사람들 눈에 그들은 특권의 자리를 탐하는 사람들로 밖에 안보인다.

영국에서는 보수당 조차, 'We are the party of working people (일하는 사람들의 정당)'이라는 정의를 앞세우고 선거에 임한다. 일하는 사람들의(of) 정치는 원래, 일하는 사람들에 의한(by) 정치다. 보수당의 공언이 비록 구호에 불과하다 하더라도 40대 중반의 그들이 왕성하게 일하는 모습을 보면 그들 스스로 '일하는 사람들' 임에는 반론의 여지가 없다. 그들은 '정치'라는 일을 정말 열심히 한다. 이에 반해, '다선, 현역 물갈이'가 정치 혁신의 주요 과제로 등장하는 걸 보면, 한국의 정치는 여전히 특권층의 놀음 같다. 특권은 없애면 되는 일이다. '물갈이론'은 특권의 존치를 전제한다는 점에서 특권 '경쟁'이지 혁신이 아니다. 혁신해야 할 것은 오히려 '정치 유입 구조'다. 정치를 꿈과 비전이 있는 사람들이 모여드는 매력적인 공간으로 만드는 것, 그것이 진짜 혁신의 과제다. 

민주주의는 그 사회의 '의사결정 시스템'이다. 그리고 민주주의는 ‘내가 하는 것'이다. 나에게도 동등한 한 표의 권리가 있다는 선언으로부터 출발한다. 여기서 '나'란 누구인가? 일하는 사람(working people)이다. 그래서 가장 단순하게 말하자면 민주주의는 그 사회에서 가장 왕성하게 일하는 이들의 리더십을 확보하는 일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영국 정치의 40대 리더십에 주목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이는 '세대교체'의 문제가 아니라 '민주주의(Democracy)' 그 자체의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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