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간의 과장을 덧붙여 상상해 본다. 도심에 낡고 오래된 공공주택 단지가 있다고 하자. 한국의 경우 순서는 이렇다. 선거 현수막에 '땅 값이 오른다'를 써넣은 모 여당 국회의원처럼 뉴타운 개발과 같은 노골적인 선거 공약이 등장한다. 담당 공무원은 평소 익숙한 엔지니어링 업체를 통해 밑그림을 그리고 용역을 맡긴다. 업자들은 주민들을 만날 이유가 없다. 용적률 등을 따져 수용 가능 가구수가 기능적으로 계산되고 철거 일정과 예산에 맞춘 건축 도면까지 나온다. 불거질 수 있는 모든 사안에 해결방안, 반박자료도 다 담겨 있다.
그런데 참 이상한 것은, 답은 모두 나열되어 있는 것 같은데 정작 핵심적인 질문에 똑 부러지는 답은 아닌 듯하다는 점이다. 결국 문제는 언론관리다. 답이라 하면 답이고 아니라하면 아니기 때문이다. 이해관계자들의 입장에 따라 여러 계산들이 부딛힐 때, 언론의 부정적 논조가 가세하면 한바탕 전쟁은 불가피하다. 투트렉이다. 전쟁은 치르되 공사는 계속 진행한다. 2009년 용산참사와 같이 끝내 유혈사태가 발생하기도 한다. 세상이 반짝 이 곳을 주목하지만 결국 다치고 구속되는 건 주민들 뿐이다. 담당 공무원은 이미 승진해서 다른 자리로 옮겼다. 건설업자는 갈등 비용에 볼멘소리를 하지만 끝내는 손해 볼일은 없다. 날림에 부실한 공사는 갈등으로 인한 비용이라 치부된다. 세금은 원래 예산 보다 곱절 넘게 들었다.
사안과 상황에 따라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반복되는 순서는 그리 틀리지 않을 것이다. 영국은 어떻게 할까? 협동조합형 구청(Co-operative Council)으로 알려진 영국 런던의 람베스(Lambeth) 구청이 이런 문제에 접근하는 법을 지켜 보았다. 그 첫 단계다. 재개발의 요구는 있으나 '이들은 아직 아무것도 결정하지 않았다 !'. 이것이 중요하다. 그들은 우선 전문성있는 커뮤니티 단체(Social Life)를 중심으로 현재 주민들의 의견을 듣는 사업부터 시작한다. 우리는 지난 2월부터 이들의 작업을 지켜보았다.
이들은 단순한 여론조사에 그치지 않는다. 지역 재생 사업 추진 일반에 대한 의견은 물론이고 각각의 시나리오에 따라 고려되어야 할 사안들을 가능한 마지막 한사람의 주민까지 만나 꼼꼼하게 기록한다. 개발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이익은 주민들의 입장에서 평가되고, 개발에도 불구하고 공동체의 유지를 위해 남겨져야 할 것들도 구체화 된다. 위 케이스의 경우 커뮤니티운동 역사가 담긴 공간을 지켜달라는 주민들의 의견이 있었다.
이렇게 조사된 내용을 바탕으로 두 달 이상 주민들과 워크숍이 이어진다. 이때, 복수의 건축가들이 예상 가능한 설계도면과 모형(options)을 제작해 주민회의가 생산적으로 진행될 수 있도록 지원한다. 물론 이 옵션 설계도면은 오직 주민들의 의사결정을 돕는 참고자료에 불과하다. 실제 사업실시 여부가 최종결정 되면 설계는 공모를 거친 새로운 건축가에 의해 업그레이드 된다. 6개월에 걸친 이 준비/기획 과정이 최종 보고서에 담기면 이를 존중하여 구청이 공식적으로 의사결정을 내리고 본격적인 사업집행에 들어갈 것이다. 이런 식으로 수렴된 의견을 행정에서 따르지 않을 방법이 없고, 이런 식으로 집행되는 사업에 불필요한 갈등이 빚어질 이유도 없다. 예산은 계획 대로만 집행될 것이다.
Expected Timetable
january : CONVERSATIONS WITH RESIDENTS & COMMUNITY
February : EXHIBITION OF WHAT WE'VE BEEN TOLD
March, April : WORKSHOP AND DISCUSSIONS WITH RESIDENTS ABOUT DEVELOPMENT OF OPTIONS
May : FINAL EVENT FOR WHOLE ESTATE TO SEE OPTIONS FOR the FUTURE
Late May : PRODUCING FINAL BRIEF
June : LAMBETH CABINET TAKES DECISION ABOUT FUTURE OF THE ESTATE
한국과 영국 두 경우를 비교하면 그 차이는 너무나 분명하다. 한국의 경우, 주민갈등에다 세금은 곱절로 쓰고 종국에 취약계층의 주거생활 안정이라는 원 목표도 실종 된다. 후자는 이에 반해 정책의 목표를 중심으로 사전 준비 단계부터 프로세스가 잘 디자인 되었다. 이것이 바로 공공서비스 사업 계약 전 사회적, 경제적, 환경적 가치 검토를 의무화한 영국의 공공서비스-사회적가치법 (The Public Services (Social Value) Act 2012) (줄여 '사회적가치법')이 요구하는 바다. 2010년, 보수당 의원(Chris White)에 의해 입안된 사회적가치법안은 사회적경제, 시민참여 활성화 및 투명성 증대 등을 목표로 한 것이지만, 사실 그 이전에 우리에게 더 의미심장한 것은 '공공사업의 사전 기획/준비 단계(Pre-Procurement Stage)'를 의무화 했다는 점이 아닐까 한다. (물론, 이 법이 사회적경제 활성화 법으로 논의된다는 것은 거꾸로, 공공사업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서라도 사회적경제 활성화가 요구된다는 뜻이기도 하다.)
생각해 보면 참 이상한 일이다. 돈이 더 많이 드는 것도 아니고 (이건 정말이다 !) 사전 준비 단계를 철저히하고 투명하게 해서 좋지 않을 일이 어디 있겠는가? 영국에 사회적가치법이 도입된 것은 겨우 2년 전이지만 영국의 행정은 이미 오래 전부터 각 정부 수준에서 그런 절차를 지켜왔다고 보는게 맞을 것이다.(참고) 그게 소모적 갈등도 없애고, 예산도 줄일 수 있는 민주적 방식임을 이들은 경험으로 안다. 람베스구청도 2012년 법안 발효 이후에서야 위와 같은 프로세스를 만든게 아니다. 한국도 몰라서 못하는게 아닐 것이다. 의지가 있으면 지금이라도 그런 절차를 도입할 수 있다. 그런데도 왜 우리는 똑 같은 문제를 반복하는가? 알면서도 반복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 질문에 직격으로 답해야 한다.
우선은 정치다. 무능한 정치가 정책의 정통성을 확보하려는 노력 없이 임기 내 완성이라는 조급증을 반복한다. (물론, 서두른다고 일이 빨리 진행되는 것은 아니다 !) 투명하지 않은 공공사업의 뒤에 정치와 유착해 손쉽게 이윤을 확보해 온 경제, 공공사업을 사적 권력 쯤으로 여기는 나쁜 공무원의 경우까지 결합하면 삼각편대가 완성된다. 그 어느 쪽도 시민들의 참여가 달갑지 않고, 투명성은 경제 성장의 적 쯤으로 여긴다.
'사회적가치법'은 그런 의미에서 지금 한국에 더 필요한 법이지 않을까 한다. 행정은 서비스디자인(service design)의 관점으로 공급자 중심의 사고를 버려야 한다. 국민의 피같은 세금이 가치있고 효율적으로 투입될 수 있도록 '커미셔너'로서 공무원의 전문성을 키우고, 집행의 절차를 다듬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지난 포스트에서 소개했듯 구청의 조직구조를 1. Commissioning Cluster, 2. Delivery Cluster, 3. Enabling Cluster 로 (발주하고/집행하고/지원하는) 개편한 런던 람베스 구청의 예는 좋은 본보기다. 정치는 주민참여를 조직하고 이해관계를 조정하는 역할(facilitator)로 자신의 역할을 적극적으로 재구성해 볼 필요가 있다. 그것이 기성 정치인들에게는 전통적으로 기대한 '권력'을 내려놓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결국 시민들과 나누는 권력은 다시 '신뢰'라는 자산으로 미래를 보장받기 때문에 권력의 힘은 더 커진다. 이것이 소위 '거버넌스'가 작동하는 매커니즘이고, 진짜 민주주의의 모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