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정부의 사회혁신추진단
기획재정부, 과학기술부, 고용노동부 등 중앙부처 공무원과 민간 전문가로 구성된 사회혁신추진단이 네덜란드와 영국을 방문했다(2018년 4월10-21일). 사회혁신추진단은 새정부가 들어선 2017년 9월 행정안전부 정부혁신조직실 산하에 설치된 중앙정부 최초의 사회혁신 조직이다. 청와대 사회혁신수석실과 함께 마침내 한국에도 사회혁신이 본격화할 진용이 갖추어진 셈이다.
이참에, 조금 일찍 사회혁신을 다루어 온 이들에겐 좀 불편하게 들릴지 모를, 도발적인 명제 하나를 꺼내고자 한다. '사회혁신은 국가혁신의 방법이지 시민운동이 아니'라는 말씀이다. 이전 정권에선 '나라도 아닌 나라'였던 탓에 국가혁신을 논할 수 없었고, 시민운동 수준에서나마 흉내를 낼 필요도 있었지만, 중앙 지방 할 것 없이 사회혁신 정부조직이 설립된 지금은 아니다. 왜 그런가?
'시민 참여로 사회문제를 해결하고, 정부는 뒷받침하는 국민이 주인인 정부 구현', 사회혁신추진단이 내세운 조직의 비전이다. 오해의 소지가 많다. 과연 대한민국에 사회문제를 해결할 의지와 역량을 가진 '참여하는 시민'은 있을까? 시민을 앞세우고 정부는 뒤로 물러서는게 사회혁신이었던가? 이 비전에 의하면 시민사회 역량 강화를 기반으로 삼고 천천히 천천히, 사회혁신은 마치 슬로우푸드처럼 추진해야 하는 것처럼 보인다. 더 낮은 곳, 더 작은 것부터, 더 많은 시행착오와 숙성을 거쳐야 하는, 어디가 시작이고 어디서 끝내야할 지도 모를 일이 사회혁신이다.
비전이 이렇게 잡힌 것은 아마도 지난 10년간 신권위주의 정권의 혹독한 정치환경에서 사회혁신을 주창했던 이들의 경험과 판단이 배경에 있을 것이다. 국가주도와 관료주의의 수직적 질서에 압도당했던 과거의 반작용이 풀뿌리, 아래로부터의 사회혁신으로 브랜딩 된 듯 하다. 그 정성을 모르는 바 아니지만 그 뿐이라면, 동의하기 어렵다. 사회혁신이 시민사회 운동을 정부가 수용하는 과정에 불과한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탑다운(Top-down)의 협치가 어불성설이듯, 바텀업(Bottom-up) 의 협력 역시 작동하지 않기는 마찬가지다.
사회혁신은 시민운동이 아니다.
시민사회의 기득권 유지를 위한 트랜디한 방편으로 '사회혁신'이 이용되는 것은 아닌지 반성해 보아야 한다. 이들에게 사회혁신은 기존에 해 왔던 시민참여 운동을 좀 더 근사하게 포장하는 정도에 머문다. 일단 '혁신'이라 불러놓긴 했으나 시민자치 권력 확대 주장 이외에 실질적 변화의 내용은 없이, 젊고 화려한 방법, 겉으로 세련되어 보이는 데만 신경을 쓴다. 왜 지금 사회혁신인지, 무엇이 새로운 생각이고 시스템 변화인지, 활동가를 넘어선 진짜 시민은 어떻게 만날지, 진지한 대화와 모색보다 형형색색의 포스트잇이 먼저 붙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정부 사회혁신 주무부처 입장에서도 힘 빠지기는 마찬가지다. 새정부의 야심찬 의지로 신설되긴 했으나 빛나는 조직으로 보이지 않는다. 임기 1-2년 안에 성과를 내야 하는 '일하는 사람들'의 속도와 밑도 끝도 없는 아래로부터의 시민참여란 근본적으로 들어맞지 않는다. 그러니 국민참여, 시민협력, 주민자치지원 등 대민 소통업무를 한데 끌어 모은 것일 뿐, 사회혁신은 원래 해오던 시민참여 지원 부문을 좀 더 전문화 하는 수준에 불과해 보일 수 있다.
그렇다면 이렇게 묻자. 시민이 낸 세금으로 운영되는 국가에게 시민의 말만 들으라며 힘을 빼는게 '혁신'이 될 수 있는가? 과연 지금 국가가 혁신의 동력을 시민에게 구하고 뒷전에 빠져있을 만큼 한가한가? 그렇지 않다면 무언가 잘못된 것이다.
시민이 스스로 사회문제를 해결에 나서는 것은 혁신이라는 근사한 말로 표현될 것이 아니라 살아남기 위한 처절한 몸부림과 같다. 시민운동은 권위주의 국가에 저항한 모델이었다. 그들에게 혁신의 과제와 책임을 지우는 것은 불공평할 뿐 아니라 불온한 책임전가이다. 정작 사회혁신으로 시스템변화를 추구해야할 곳은 국가다, 정부와 공공기관들이다. 사회혁신은 국가사회가 작동을 멈춘 곳에서 사회적 가치를 곧추 세우고 더불어 함께 새로운 길을 모색할 수 있게 하는 시스템 혁신의 방법이다.
좀 더 나은 사회로 전진시켜야 하는 책임은 언제나 국가가 가장 크게 짊어져야 한다. 탑다운도 아니고 바텀업도 아니다. 새로운 질서를 만드는데 위로부터든 아래로부터든 기성 질서를 전제할 이유가 없다. 오히려 사회혁신은 권력의 속성을 새롭게 발견하고 새로운 기관을 만들고 역할을 재배치하는 사회 디자인의 작업이다. 그래서 물론, 사회혁신은 정부혁신과 따로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다. 하지만 사회혁신은 정부혁신의 한 분야가 아니라 정부혁신의 철학과 방법을 제공하고 공공부문 전 영역에서 시스템 혁신을 드라이브하는 메타적 위상을 가져야 한다. 그것이 이 시대가 목도하고 있는 글로벌한 사회변화, 새로운 민주주의가 요청하는 바다.
사회혁신은 국가혁신의 방법이다.
이미 오래전부터 유럽의 사회혁신가들이 한국을 주목한 이유가 있다. 디지털 접속률이 높고 시스템과 문화 전반에서 국가 주도성이 압도적인 한국은 어쩌면 새로운 사회시스템을 실험하기 위한 최적의 조건을 갖추었다. 전국 동시 선거가 일반적이라 중앙정부와 지방정부가 일색으로 움직이고, 획일적인 아파트 공동주거가 일반화되어 있다. 글로벌 사회혁신의 태두라 할 수 있는 네스타(nesta) 대표, 제프 멀건(Geoff Mulgan)의 말이다.
흔히 진보적 시각에서는 부정적으로만 여겨졌던 대한민국 사회의 조건들, 한국적 상황이 사실은 정반대다. 시민사회와 지방자치의 미성숙, 심지어 군부독재의 경험까지, 유럽인들의 눈에는 혁신을 도전해 볼만한 긍정 요소로 받아들여졌다. 박원순의 서울시가 언제나 주목의 대상이 되었던 이유도 그 때문이다. 시민사회가 발달해 있는 유럽에선 오히려 너무나 익숙해서 국가시스템을 바꾼다는 인식을 확산하기 어려운 반면, '이게 나라냐'라며 전국민이 촛불을 들 줄 아는 한국사회에선 시스템혁신의 관점이 온전히 살아날 수 있다.
그런 한국이 이제와서 유럽을 본 따 봉건적 지방자치를 원하고, 시민사회부터 천천히 숙성시켜야 한다면? 본말(本末)의 전도다. 우리는 우리 토양과 문화에 맞는 사회혁신을 해야 한다. 바꾸어야 하는 문화가 있다면 그것 또한 건설적이어야 한다.
과거의 시민운동도 과거 시스템의 일부다. 시민운동이 사회혁신을 주도하는 것은 시대에 맞지 않다. '운동'의 기틀을 바꾸지 않는 이들에게 '사회혁신'은 새로운 '좌파 운동'이다. 진영 다툼에 휩쓸려 포지셔닝에 실패하면 사회혁신은 어느새 '사회주의 운동'이 되고 만다. 사회혁신은 옛 시스템 너머, '다음 체제'를 지향하는 새로운 비전을 보여주어야 맞다.
그런 맥락에서 새정부의 사회혁신 국정과제가 정부혁신의 세부 '아이템'으로 사회혁신을 배치하고 시민참여형 사업으로 그 과제와 범위를 축소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아쉬움을 넘어 우려스럽다. 오히려 '사회혁신 아이템'이란 없다고 선언하는게 어떨까 한다. 읍면동 마을만들기, 온라인청원시스템 같은 것들을 사회혁신과 등치시키는 것은 곤란하다. 청년 실험실 처럼 운영되는 서울의 혁신파크는 청년일자리, 복지정책 차원이면 몰라도, 그것이 곧 사회혁신의 전부는 아니다.
혁신은 혁신(革新)다워야 한다.
사회혁신은 사회변화를 반영하는 국가공동체의 발전 전략과 태도 변화를 목표로 한다. 변화에는 강력한 리더십과 실천이 뒤따라야 한다. 명령하고 따르는 수직적 위계가 아니라 참여와 협력을 부르는 리더십, 엄정한 논리와 과학적 합리성에 기초한 목표 설정, 효과적인 자원 배분이 없이, 혁신은 아무나 혁신이다.
국가의 자원을 독점하고 있는 정부가 책임지고 이를 실현할 근거, 기준, 논리와 데이터를 제시해야 한다. 사회혁신은 정치 진영의 입장에서 할 수도 있고 안할 수도 있는 정책이 아니라 민주국가라면 해야만하고 하지 않을 수 없는 무엇이라는 관점이 중요하다. 국가사회적으로 해야 할 옳은 일, 그리고 그것을 추진하는 올바른 방법을 규명해 내는 일, 그것만큼 중요한 혁신 사업은 없다. 그것 없이는 어떤 자원도 혁신에 투입하고 매진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것 없이는 그동안의 모든 관행이 장애물이 되기 때문이다. 장애물이 많아서 혁신이 어려운 것이 아니라 장애물을 넘어서는 것이 혁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