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은 지금 전당대회(Party Conference) 시즌이다. 매년 9월말 10월초에 의회 문을 잠시 닫아 걸고 정당별로 주요 의제와 정책을 가다듬는 시간을 갖는다. 지난주부터 자민당, 이번주 노동당 그리고 다음주 보수당 순이다. 노동당 전당대회의 주인공은 단연 제레미 코빈 새 당수다. 지난 9월 12일, 60%의 기록적인 지지율로 선출된 그다. 선거를 전후로 신규 가입한 노동당원만 16만명에 이른다. 전체 50만 당원의 30퍼센트가 넘는다. 모두 제레미를 보고 가입한 사람들이다. 한참 기세등등해도 좋을 그다.

Jeremy Corbyn, photograph: Leon Neal/AFP/Getty Images

Jeremy Corbyn, photograph: Leon Neal/AFP/Getty Images

"I am not imposing leadership lines. I don't believe anyone has a monopoly on wisdom - we all have ideas and a vision of how things can be better. I want open debate, I will listen to everyone, I firmly believe leadership is listening." - 당대표라고 내 생각을 강요할 생각 없다. 당의 지혜를 혼자 독점할 수 없다. 누구든 새로운 아이디어와 비전을 개진할 수 있고 나는 언제든 토론에 임할 자세가 되어있다. 들을 것이다. 리더십은 듣는 것이다. - Jeremy Corbyn, Labour Party Conference 2015

어쩌다 당권을 잡은 비주류가 타 계파를 포섭하기 위한 제스처일까? 그렇진 않을 것이다. 맨 뒷 줄이긴 하지만 하원의 녹색 벤치를 32년간 지켜온 베테랑이다. 해묵은 정책 하나 통과시켜 보겠다고 리더십 캠페인에 나서진 않았을 것이다. '좌파적' 정책에 대한 대중의 지지가 그를 무대로 올린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 '좌파 정책'이라는 것도 언론이 먼저 그를 '늙은 좌파'로 규정짓고 그 틀에 따라 해석해 놓은 것들이다. 그러니 그의 정책이라고 '알려진' 것들이 당내 토론과정을 거쳐 뒤로 밀린다고해서 그가 '공격받고 있다'고 쓰고 그의 표정을 클로즈업하는 것은 뭔가 바텀라인을 잘못 읽은 것이다.

이번 전당대회는 끝내 핵무기 관련 정책에 관한 결론을 맺지 못했다. 국방장관 임명자와 당대표 본인의 입장이 다름도 솔직히 밝힌다. 비주류 출신 리더의 당 장악력 부족이 아니라 당 내부에서부터 토론과 정치가 살아나는 증거라 한다. 소수 엘리트가 주도한 정책 결정 프로세스가 '민주화' 된 것이다. 이전의 전당대회가 이미 정해진 정책을 홍보하는 쇼비지니스였다면 제레미의 전당대회는 당의 정책 우선순위와 당론을 토론하고 결정하는 실질적인 최고 의사결정의 장이었다. BBC의 앤드류 마(Andrew Marr)는 이처럼 흥미진진한 전당대회는 없었다고 고백한다. 

당대표 선거 때부터 그랬다. 여야 막론하고 모든 주류 정치인들이 그를 핫바지 취급했다. 철도를 재국유화하자는 것도 핵무기 철폐 주장도 모두 세상 물정 모르는 '극좌 포퓰리스트'의 넋두리로 취급했다. BBC는 물론, 가디언까지 예외가 아니다. 퍼블릭 오너십(public ownership)을 이야기하면 국유화(state ownership)로 읽고 '공산주의자'라 낙인 찍는 식이다. 마치 북한 김정은을 대하듯 '시장경제를 인정하냐'는 질문도 서슴없다. 기성의 정치와 공장식 정책 프레임이 그렇게 짜여져 있고 언론도 그 프리즘 만으로 그를 비춘다. 그렇게는 제레미를 읽을 수 없고 길들일 수 없었다. 진실은 두고 볼 일이지만 어쨌든 지금까지는 그렇다.

Photograph: Graeme Robertson for the Guardian

Photograph: Graeme Robertson for the Guardian

기성 정치와 언론과 달리 유권자들은 제레미를 '늙은 좌파' 거나 '유약한 리더십'이라 보지 않는 것만은 분명해 졌다. 선거에서의 압도적 지지와 폭발적인 신규 당원 가입이 이를 증명한다. 도대체 유권자들은 어디에서 그의 '새정치'를 읽었을까? 단박에 차오른 그에 대한 열광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

그의 메시지를 들어보자. 그는 여느 정치인의 그것처럼 '불평등과 가난을 해소해 주겠다’고 외치지 않는다. '경제민주화'라는 모호한 개념을 쓰지 않는다. 대신 ‘불평등 할 필요가 없다(don’t have to be unequal)' 거나 '가난은 불가피한 것이 아니라 불필요 한 것이다(poverty is unnecessary)'라 주장한다. 그의 표현에는 정치의 주체가 바뀌어 있다. 시민을 나약한 존재로 그리고 그위에 군림하는 '시혜적' 정치인의 선동이 아니라 인권운동가, 캠페이너의 목소리다. 그의 메시지에서는 민주주의 정치를 구성하는 살아있는 단위로서 시민이 당당한 주권자로, 정치의 주체로 호명된다. 어떤 언론은 '진짜 정치'의 시작을 찾으려 했고 다른 언론은 포퓰리스트라 매도했다.

'숙명'과도 같은 '경쟁사회'는 피할 수 없는 진실이 아니라 시대가 만들어 놓은 '이데올로기'에 불과하다. 바꿀 수 있고 바꾸어야 한다.(We can and must change !) 모두에게 최소한의 품위있는 삶을 보장할 만큼, 부(富)는 이미 충분하다.(We are rich !) 문제는 사회와 제도가 그런 방향으로 작동하지 않는 것 뿐이다. 가난한 당신이 참고 견뎌야 할 일이 아니라는 용기를 주니 제일 먼저 젊은이들의 반응이 살아났다. 디지털 인류인 이들에게 정치참여는 그리 특별한 것이 아니다. 문제는 이들의 가슴에 불을 지르는 메시지 였을 뿐이다. 평생을 캠페이너로서 살아온 제레미는 그런 면에서 딱 들어맞는 '새로운' 정치인이었다. 오늘, 영국 정치의 거물로 첫 컨퍼런스 스피치를 하면서도 여전히 인권운동가로 살아갈 것이라 천명한다. 

여전히, 우리시대의 주류는 '내가 먼저' 차지하기 위해 경쟁하고 '나 아닌 것'을 적대시 한다. 생김이든 생각이든 내 모양에 들어맞지 않는 모든 것은 불온하고 위험한 것으로 간주한다. 힘이 있으면 찍어 누르고, 힘이 없으면 피했다. 평화는 힘의 균형에 불과해 보인다. 정치를 '나 아니면 남' 식으로 좌파니 우파니 정의하는 것은 그래서 위험하다. 정치는 그렇게 전쟁터로 변했다. 제레미를 '구좌파'로 치부하던 노동당의 프론트 벤처들은 그렇게 당원들, 국민들의 신뢰를 잃었다.

사실 지난 5월 총선에서 노동당이 정권을 되찾았다 하더라도 영국사회가 크게 달라질 것은 없었다. 작동하지 않는 사회와 기성의 제도가 문제인데 오랜 집권당이기도 한 노동당 주류 역시 그 작동하지 않는 시스템의 일부기 때문이다. 스스로가 기득권의 일부라는 사실을 처절하게 인정하는 것, 그것이 새로운 노동당 건설의 출발점이다. 이번 전당대회의 메인 카피는 'Straight Talking, Honest Politics - 솔직하고 정직한 정치'다. 겸허하게 정치의 초심으로 돌아가자는 것이다. 기성정치에 억눌린 하나하나의 신념을 끄집어 내보는 것이다. 돌이켜 보면 만연한 부조리에 분노하기는 커녕 스스로 그 부도덕한 질서에 일조했거나 노예 였음을 깨닫는다. 현직 노동당 국회의원들 조차도 '이제야 가슴 한구석의 부끄러움을 걷어내고 당당할 수 있겠다'고 실토한다. 

"Don’t accept injustice, stand up against prejudice. Let us build a kinder politics, a more caring society together. Let us put our values, the people’s values, back into politics." - 부당함을 용인해선 안된다. 편견에 맞서자. 사려 깊은 정치, 배려 하는 사회를 만들자. 우리의 신념을 모두의 가치로 만들어 정치에 반영하자. - Jeremy Corbyn, Labour Party Conference 2015
Photograph: Graham Turner for the Guardian

Photograph: Graham Turner for the Guardian

민주주의는 서로 다른 주장들 중에 하나를 고르는 다수결의 기술이 아니다. 민주주의는 열려있는 것이다. 함께하고 협력해서 만들어가는 대화의 기술이다. 제레미가 선거운동기간 단 3개월만에 리더로 부상한 것처럼 정치문화가 그 속도 만큼 변화하리라 기대할 수는 없다. 시행착오도 있을 것이다. 노동당 지지자를 제외한 시민들에게 제레미는 여전히 듣보잡일 수 있다. 주류 언론은 사사건건 시비다. 그러나 그들 조차도 '새정치(New Politics)'를 운운할 정도로 정치 담론 지형에 의미있는 균열이 생겼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다. 

다시 한 번 제레미가 상기시킨 것을 간단히 정리해 보자. 먼저 영국인들에게, 여야를 막론하고 '성공한' 정치인들과 자신이 같은 꿈을 꾸고, 같은 가치를 공유하지 않는다는, 그리 새로울 것은 없지만 곤혹스런 사실이다. 겨우 몇 달 전 압도적 지지로 선출한 정치지도자에게 이런 생각을 갖게 되는 건 현대 민주 정치의 한계이자 비극이 아닐 수 없다. 노동당 스스로도 마찬가지다. 그들이 목표하는 것이 지금 보수당의 위치를 대체하는 데 있지 않다는 사실, 그런 정치기술자에 머무는 건 정말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 일이라는 사실, 스스로 대안이 아닌 줄 알면서도 정답인 양 포장하거나 끊임 없이 정치적 타협을 강요 당하는 현실에 맞서 불현듯, 반드시 그럴 필요는 없었다는 깨달음이다. 34살에 국회에 들어와 66살이 될 때까지 32년째 정치인이면서 인권운동가로 살아온 제레미 코빈이 그 살아있는 증거다. 

이미 유권자는 정치지도자를 따라가는 수준에는 만족하지 않는다. 프로슈머(prosumer)의 일상에 익숙해진 지 오래다. 정치인은 그런 시민들을 움직이는 메시지를 담고 있는 캠페이너 여야 한다. 누구 말마따나 리더십이 아니라 팔로워십이 필요한 시대다. 그리스에서 스페인에서 그리고 미국과 영국에서 확인하는 바다. 어쩌면 지금은 그 공통의 경험에서 발생하는 차이를 발견해야 할 시점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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