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무총리 후보자 청문회에 여지없이 부동산 투기 의혹이 튀어나왔다. 부동산은 한국인들의 일생을 건 투자처이자 최고의 관심사의 하나임을 다시 확인한다. 그런데 의문 하나, 왜 한국의 주요채널에서는 그렇게 중요한 이슈인 부동산을 다루는 논픽션 하나 찾기도 어려울까? 기껏 이런 청문회를 통해 숨은 이야기들이 드러나면 그때서야 이러쿵 저러쿵 입방아다. 물론, 늘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주제라도 그것을 기반으로 방송을 기획하는 건 생각처럼 쉽지는 않다. 그러나 널뛰는 전세값을 피해 이리 쫒기고 저리 쫒기는 사람들의 이야기도 있고, 처음으로 집을 사려는 사람들은 투명하고 공정한 정보에 얼마나 목이 마르겠는가? 영국이라고 부동산에 민감하지 않을 리 없다. 런던의 요동치는 집값은 뉴스를 채우는 단골 메뉴다. 그러나 거기에 더해 영국에는 주요 채널마다 부동산 관련 정규 프로그램 한 두개씩은 기본으로 배치되어 있다. 그게 다르다.
시청률 지상주의에 빠지지 않되 시청자들의 이해에는 민감한 방송, 방송은 서비스업이다. 부동산, 한국에서는 특히 얼마나 민감한 소재인가? 하지만 그만큼 잘 다루어야 할 가치있는 주제다. 시중의 관심과 필요에 맞추어 프로그램을 기획하면 시청률은 따라오게 되어있다. 문제는, 그럴려면 방송사와 프로듀서들의 눈이 훨씬 더 시민을 향해 있어야 하고 창의적 포멧을 개발하기 위해 더 머리를 싸메야 한다. '사용 빈도에 비해 이해도가 낮은' 주제의 핵심을 짚어내기 위해선 그 차이 만큼 노력하고 투자해야 한다. 그러나 당장의 시청률에 급급하다 보면 맥락없이 유행을 쫒고 베끼기 바쁘다. 거기에 익숙한 시청자들 역시 방송에서 자신의 문제를 찾기 보다 수동적으로 소비할 뿐이다. 그렇게 미디어는 오락이 된다. 오락이 나쁘다는 뜻이 아니다. 오락은 다만 방송이 해야할 일의 일부이거나 중요한 것들을 더 재미있게 다루는 수단일 뿐이다.
왜 한국의 방송은 수용자의 이해를 먼저 생각하는 담대한, 또는 기본에 충실한 전략을 취하지 못하는가? 분석하자면 여러가지 배경이 있을 것이나 한가지 해법만 생각해 보면, 남들이 경쟁에 혈안이 되어있을 때 공영방송이 자신의 자세를 흔들림 없이 지켜주면 된다. 공영방송의 제1의 역할은 모범을 보이는 것이다. 당연히 정권의 부침에 흔들리지 않아야 하지만, 공영방송과 미디어의 소명을 지키는 것은 뉴스의 정치적 중립, 그것보다 훨씬 더 큰 일이다. 드라마 [미생]이 좋은 예다. 기획이 시민의 이해에 닿아 그 공공성을 인정 받으면 정치적 이해로부터도 자유로울 수 있는 것이다. 소위 좌파 진영에서도 뉴스만 갖고 공영방송이네 아니네 하는 수준을 넘어서야 한다. 뉴스는 많고 많은 프로그램의 하나에 불과하다. 편가르기에만 그치는 정치뉴스의 동어반복은 방송의 공공성과 그 역할을 축소시킬 뿐이다.
참신한 포멧과 스토리텔링으로 우리사회가 안고 있는 가장 일상적인 문제에 공감을 이루는 것,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방송은 그것만 해주면 된다. 장르불문, 심각한 탐사보도일 수도 있고 예능일 수도 있다. 지금 그걸 누가 해주고 있는가? 국민의 돈을 직접 받아 쓰거나 구조적으로 또는 정책적으로 재원을 확보하고 있는 공영방송이 아니라 종편 또는 상업방송의 일부, 아주 일부의 개인들이 해내고 있다. 역으로 말하면 어느 채널도 채널 콘트롤러 수준에서 그런 기획과 방향성을 견지하고 있지 않다는 뜻이기도 하다. 혁신의 블루오션이 아닐 수 없다.
그러고 보면 우리가 소셜섹터를 이해하는 입장도 비슷하다. 사회혁신(Social Innovation)이든 사회적경제(Social Economy)든 그것 역시 팬시한 아이템과 포멧을 베끼는데만 열중하고 있지는 않은지 반성해 볼 필요가 있다. 방송이 뉴스를 통해 정치에 기생하듯, 사회혁신이라 브랜딩된 프로젝트가 여전히 권력의 부침에 흔들리는 수준이라면 그것도 문제다. 돈에 눈 먼 시청률 지상주의가 시청자를 숫자로만 상대하듯 돈과 권력을 향해 선 프로젝트는 진실된 소셜(social) - 협력을 부를 수 없다.
경쟁하는 사회혁신, 협력없는 사회적경제는 거짓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