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주의와 그 변형
자본주의와 그 변형
자본주의에 대한 비난은 쉽다. 최근 수십년은 신자유주의가 모든 사회문제의 주범이었다. 우리는 그런 환원적인 의견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러나, 300년 가까운 '근대'와 미래의 세계를 조망하며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물음을 던질 때, 자본주의에 대한 이해는 여전히 피해갈 수 없는 관문이다. 그래서 물었다. 도대체 자본주의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
자본주의는 매우 추상적인 개념입니다. 사실 자본주의는 어떤 힘의 작동 같은 것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힘은 다른 여러 힘들과 함께 작동합니다.
로빈 머레이(Robin Murray) 교수에 의하면 자본주의는 고정된 제도가 아니라 일상을 지배하고 강제하는 생각 또는 문화다. 자본주의는 세상을 돈으로 환산하고 그 돈(이윤)을 위해 규모로 팽창하는 힘이다. 그러나 로빈의 답에서 정작 중요한 지점은, 자본의 힘이 여러 다른 힘들과 '함께' 세계를 구성하고 있다는 위 문장의 후반부다. 자본주의는 세계의 전부가 아니라 일부라는 것, 혁신가는 그 지점을 파고든다.
카프카의 소설 '변신(The Metamorphosis)'은 가족마저 삼켜버린 자본주의적 소외를 벌레로 전락한 한 인간의 비참으로 그려냈다. 하지만 소설의 극적 묘사와 달리 혈연과 같은 폐쇄적 단위로 묶인 가족의 일상은 여전히 이윤으로 움직이는 자본주의적 관계라 하기 어렵다. 계급지배의 도구로 보았던 마르크스의 주장과 달리 국가 역시 자본주의 이데올로기를 일방적으로 강제하는 기구라 하기엔 훨씬 더 복잡한 역사와 매커니즘이 있다. 무엇보다, 산업혁명에 이어 자본주의의 아이디어가 숨통을 틘 영국이, 여전히 봉건제적 신분과 군주제, 여왕을 모시고 있는 이 아이러니는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옥스포드에서 산업경제학을 전공, 서섹스대학교와 런던정경대에서 20년 가까이 경제학을 강의하던 로빈 머레이는 80년대, 마가렛 대처의 보수당 정부에 맞섰던 런던시청(당시 Great London Council)의 산업정책국장으로 발탁된다. 그때부터 그는 본격적인 싱커(thinker)이자 두어(doer)로서 혁신가의 길을 걷는다. 공정무역(FareTrade)이라는 말이 만들어지기 전부터 커피와 초콜렛 공정무역의 선구자였고, 캐나다 온타리오, 호주를 비롯 세계 곳곳의 지방, 중앙정부의 정책디자이너로 일했다. 그런 중에 영파운데이션(Young Foundation), 네스타(Nesta)와 같은 세계적인 사회혁신기관의 이론적 기초를 다졌다. 그러나 무엇보다 그는 스스로를 일컬어 코오퍼레이터(co-operator) 즉, 협동조합운동가 또는 단순히 '조합원'이라 불리길 원한다. 그가 펴낸 가장 최근 책도 ‘구글시대의 협동조합(Co-operation in the age of Google)’이다.
협동조합도 자본주의 세계의 비균질성을 증명하는 한 예다. 더구나 협동조합은 자본주의 시장 내부에서 성장하고 성공한 비지니스 모델이다. 1844년 맨체스터 인근 로치데일(Rochdale)에서 문을 연 세계 최초의 소비자협동조합 가게가 170년이 지난 지금까지 고유명사 '협동조합(더코업 The co-operative)'이라는 간판으로 성업중이다. 굳이 '규모'로 따진다면 한해 매출이 100억파운드(약 16조원)에 이르는 '더코업'은 영국 최대의 식품유통, 서비스 회사 중 하나다. 2015년 기준 영국내 협동조합 조합원은 1500만명에 이른다.(Co-operative UK 자료)
자본주의는 인간과 자연, 인간과 인간의 '관계'의 부정에서 출발한다. 애시당초 협동과는 거리가 멀다. 농민들을 땅으로부터 떼어내어 도시로 이주시키고 노동자를 가족과 이웃으로부터 떼어내어 '자유로운 개인'으로 포장한 뒤, 공장 조직과 중앙집권적 국가에 예속 시킨다. 개인주의는 규모화의 방법이었다. 공권력과 회사의 규율에 치이고 밟히며 사사로운 개인은 도시를 부유한다. '모던타임즈'의 근대적 신민이다. 그런 첨단의 자본주의가 횡행해야 맞을 영국에 '협동'의 철학이 공존하고 있는 것이다. 숫자와 과학으로 뒷받침되고 은행의 대리석 기둥처럼 견고한 듯 하지만, 세계는 생각만큼 간단하지 않음을 이 자본주의 종주국이 웅변하고 있다.
어쩌면 인간 자체가 그리 호락호락한 존재가 아님을 보여주는 것인지도 모른다. 자본주의와 거의 동시에 협동의 아이디어가 튀어나왔고, 자본과 협동은 여전히 사상적으로 경제적으로 경쟁하고 있다. 자본주의 안에 공존하는 자본주의 아닌 것에 주목하는 이러한 관점은 인간 역량에 대한 신뢰가 없으면 기대하기 어렵다. 영국의 경험적이고 공리적인 전통도 마찬가지다. 이들은 어떤 사안을 두고 좋고 나쁨으로 정의 내리지 않는다. 좋게 쓰이면 좋고 나쁘게 쓰이면 나쁘다.
스티브 와일러(Steve Wyler) 전 '로컬리티 Locality' 대표는 '국가'를 해결사로 여기는 복지국가 아이디어에 지나치게 기댈 필요도 없다고 한다. 스코틀랜드에서 공동체 토지소유, 자산 공유 운동이 확산되면서 '사유재산'의 관념이 무색해지고 있는 현상을 주목하자 말한다. 에드 마요(Ed Mayo) '영국협동조합연합회 Co-operative UK' 대표는 공유지화하는 동네 선술집(펍, Pub)처럼 일상의 현장에서 자본주의를 넘어선 공동체의 역량을 발견하기를 권한다.
작은 섬나라에 불과한 영국이 근대문명을 주도하는 힘은 한 시대의 통념을 절대시 하지 않는 용기에 있다. 내가 만들었으니 내가 바꾼다는 자부심이라 해도 좋다. 스티브 와일러가 소개하는 스코틀랜드 토지공유운동도 그 예다. 1999년 독립한 스코틀랜드 의회의 토지개혁(Land Reform Act 2003)이 그런 흐름을 촉진하는 제도적 장치다. 창조와 혁신이 변방에서 시작 한다면 영국만큼 분명한 곳도 없다. 특히 스코틀랜드는 영국을 새롭게 하는 아이디어의 산실이다.
과연 사유재산에 대한 관념은 근본부터 흔들리고 있는 것일까? 그것이 자본주의의 핵심 동력, 돈과 규모, 공장식 문화를 얼마나 제어할 수 있을까? 공동체 토지 소유, 활용을 권장하는 것은 지연된 토지개혁의 기회를 잡은 스코틀랜드만의 사례일 뿐일까? 마을 단위 공동체에 주어진 토지는 어떻게 쓰일 수 있고 어떤 가능성을 열어주는 것인가? '스코틀랜드로부터의 시그널'을 우리는 어떻게 읽어야 하는가?
소유란 무엇인가?
소유란 무엇인가?
프랑스의 철학자 프루동(Pierre-Joseph Proudhon)은 일찌기 '소유란 무엇인가?'란 글에서 사유재산(property)은 (그 자체로) 도둑질(robbery)이라 일갈했다. 루소(Jean-Jacques Rousseau)는 '인간이 창조하지 않은 것을 어떻게 소유한다 할 수 있나?' 되묻는다. 사실 공유지를 사유화한 인클로저(Enclosure, 18세기)의 역사 자체가 힘으로 철조망을 치고 법(문서)에 기대어 내 땅이라 '선언'한 것에 불과하니 역사적 사실에 비추어도 틀린 말은 아니다. [토지]의 작가 박경리는 토지는 소유의 출발이고 소유는 문서로 표현되며 문서로부터 인간의 갈등이 싹튼다고 말했다. 위대한 문학은 위대한 통찰에 기초하고 있다.
그렇다면, 누구로부터, 무엇을 도둑질 했는가? 푸르동에 의하면, 사유(私有)로부터 사회적 정의, 공평, 그리고 자유를 잃었다. 박경리 선생이 살아계신다면 아마도, 생명과 평화를 잃었다 하지 않으셨을까? 이 주장들이 너무 추상적으로 들린다면 역으로 토지 공유(共有)를 통해 얻어낼 수 있는 무엇을 규명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공유의 가치 또는 효과가 있다면 바로 그것이 지금까지 토지의 사유화가 앗아간 그 무엇이 된다.
스티브 와일러에 의하면 지난 10여년, 스코틀랜드의 공유화 된 섬이 가져온 것은 일자리, 청년 그리고 마을의 번영이었다. 그동안 국외거주자를 포함한 몇몇 대지주에 의해 방치된 땅, 소작농들이 겪었던 일상의 가난이 걷혀져 가고 있다. 거기에 이번 장에서 주목해 볼 것은 공동체토지신탁(Community Land Trust, 이하 CLT) 모델이다. 토지의 공동체 소유는 특히 도시의 열악한 주거문제에 어떤 해법을 제시할 수 있을까? 먼저 레치워스 가든시티로 가보자
레치워스 가든시티는 런던에서 북쪽으로 약 1시간 거리에 위치한 인구 3만3천명 규모의 작은 타운이다. 1903년 이곳에 세계 최초의 뉴타운이 건설되었다. 투자수익의 욕망을 부추기는 뉴타운이 아니다. 위 '세 개의 자석' 그림이 보여주듯, 가든시티 뉴타운은, 대도시의 과밀과 농촌의 과소에 따른 장단점을 분석하고 양쪽의 장점을 결합해 ‘행복한 주거’를 실현하는 이상적인 자족도시를 꿈꾸었다. 운동을 이끌었던 토지사상가 에브니저 하워드(E. Howord)는 자신의 비전을 실현하기 위해 정치인들을 설득하고 투자자를 끌어 모아 토지를 매입, 최고 수준의 건축가에게 도시 설계를 맡겼다. 문제를 발견하고 가치와 명분을 만들고 사업 계획을 짜고 사람들을 규합해 현실화에 성공했다. 전형적인 영국식 혁신이다.
토지매입의 직접 주체는 퍼스트가든시티주식회사였다. 사람들은 저렴한 토지 임대료를 지불하고 주택을 구매, 거주할 권리를 얻었다. 임대수익은 모두 레치워스의 개발, 관리에 재투자 된다. 지난 110년 동안 우여곡절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지금까지 레치워스의 소유 구조는 근본적으로 바뀌지 않았다. 초기엔 주식회사 형태였지만 이것이 바로 공동체토지신탁모델의 원형이다. 땅을 자산화하여 공동체 이익에 재투자하고 거기서 생산되는 가치를 공동체 안에 유지해 시장에 내다 팔지 않는 것이다. 토지분, 개발이익분 만큼 부동산의 시장가격은 낮아지고 자산 수익을 바탕으로 공동체의 역량은 커진다. 부동산의 집합적 소유를 통해 도시 공동체의 지속가능성을 확보한 것이다. 팻 코너티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한국과 같은 선분양 제도가 없는 영국에서 경제가 웬만큼 안정적이지 않으면 시장이 막대한 금융리스크를 안고 주택공급에 나서기는 쉽지 않다. 만성적인 경제위기, 긴축재정에 들어간 정부가 이전처럼 대규모 주택단지 개발에 나서지도 못한다. 정부에 대한 신뢰도 예전 같지 않다. 민간이든 공공이든 공급이 턱없이 부족한데 이민자 유입은 한해 30만명에 이른다. 주택가격은 오를 수 밖에 없는 구조다. 2016년 6월, 브렉시트(Brexit) 국민투표가 현실화한 배경이기도 하다. 서민들은 살 수가 없다. 주거는 생명의 문제다.
팻 코너티에 의하면 커뮤니티 주도 주택 개발은 이제 단순히 사회적으로 의미있는 기획을 넘어 현실적으로 작동 가능한, 상식적 대안이 되고 있다. 여전히 건강하게 운영되고 있는 레치워스 가든시티의 오래된 경험도 있고, 도심 안 CLT 모델로 저렴한 주택을 구성해 낼 수 있다는 경험도 쌓이고 있다. 잉글랜드와 웨일즈 지역에는 2016년 현재 약 170여개의 CLT가 활동하고 있다. 영국 CLT 네트워크는 이들로부터 2020년까지 약 3,000개의 새로운 저렴주택(affordable house)이 개발될 것으로 예상한다. 2016년 5월 주택문제 해결을 공약으로 당선된 사디크 칸(Sadiq Khan) 런던시장은 2025년까지 런던에만 5,000호의 CLT 모델의 주택개발에 나서기로 약속했다. 영국정부도 최근 CLT를 포함한 커뮤니티주도 개발(Community-led Development)에 30억파운드(약 5조1천억)의 주택기금 융자지원 방안까지 내놓았다.
그러나, CLT가 저렴한 주택공급의 수단에 불과하다면 공공서비스 민영화의 단계적 수단일 뿐이라는 비난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할 것이다. 물론 오늘날 여러 사회문제가 복합적으로 얽혀있는 주거, 주택문제의 실질적 대안으로 거론될 수도 없었을 것이다. 카운슬하우스 또는 공공임대주택이 싼 값의 '수용소'를 제공하는 것이 아니듯, 문제는 질 높은 주거이고, 그 핵심은 '공동체'다. 주택은 건축에서 시작하지만 적정수준의(decent) 주거를 보장하기 위해선 근사한 건축물 이상의 무엇이 있어야 하고 그것이 바로 공동체, 또는 마을이다. 공동체에 의한 토지 가치의 보유가 전제되고 이를 통한 '관계'의 복원, 지속가능성이 확보될 때 CLT의 진정한 의미가 발한다.
런던에서 서쪽으로 3시간 거리에 브리스톨이라는 도시가 있다. 잉글랜드와 웨일즈의 접경에 위치한 인구 약 50만의 이 도시는 영국인들이 살고 싶어하는 영국 도시 중 하나다. 롤스로이스, 에어버스 등 항공 엔진 산업과 방송, 애니메이션 영화 산업의 좋은 일자리가 있고, 서머셋 지역의 따뜻한 날씨도 그런 인기의 배경이다. 물론 그래서 더욱, 주택문제는 브리스톨에서도 늘 골칫덩이였다. 공동체 자산화를 촉진하는 로컬리즘법(Localism Act)이 제정된 2011년, 브리스톨에도 약 150여명의 회원과 함께 공동체토지신탁(Bristol CLT, 이하 BCLT)이 출범했다. 여느 협동조합과 같이 BCLT의 회원은 1파운드의 회비로 1표의 의결권을 행사한다.
BCLT가 첫 주택개발 프로젝트 대상지로 선택한 곳은 20년동안 쓰지않고 버려진 학교 건물과 그 인근 공공부지였다. 학교 건물은 재건축계획 승인이 떨어진다면 시장가격으로 약 5억원 정도는 되는 건물이었지만 독신 주거용 사회주택 개발을 조건으로 시청으로부터 건물과 토지를 무상(1파운드)으로 제공 받았다. 그 위에 금융 조달로 6채의 가족 주택을 포함, 모두 12채의 집을 지었다. 2012년 개발 계획허가를 신청한 이후 3년이 지난 2015년 여름, 마침내 공사의 첫 삽을 떴다. 그리고 올해 2016년 여름, 드디어 입주가 시작되었다. 우리가 이들을 찾은 것은 뒤늦은 마감과 입주가 겹쳐져 있던 8월이었다.
땅값을 제외하더라도 건축비가 부족했다. 비용을 세분화해 그 부족분을 '함께' 부담할 방안을 모색했다. 그래서 나온 것이 '노동지분(Sweat Equity)'의 아이디어다. 집의 마감을 입주민들이 직접, 함께 작업하는 것이다. 이때 관련 사회적 기업, 지역 활동가들이 건축 경험 없는 주민들을 돕는다. 잭슨 몰딩(Jackson Moulding) 셀프피니시(자체마감) 매니저도 그런 예다. 셀프피니시 매니저는 그렇게 투입된 작업에 필요한 기술적인 지원과 주민들의 노동시간을 기록해 그만큼 절약한 건축비를 지분으로 나누어 주는 역할을 맡는다.
그러나 지분이나 돈보다 중요한 것은, 함께 마을을 만들고 땀흘려 일하는 과정에서 속속들이 이웃과 함께 한 노력과 시간이다. 공개모집과 추첨으로 선정된 생면부지의 사람들이 만나 마을을 만들어 가며 이웃사촌이 된다. 너른 지붕에 설치한 태양광 발전소는 마을 공동의 소득원이 되었다. 자원을 나누고, 아이디어와 노동을 나누고, 지역사회 네트워크가 협력해 불가능해 보였던 문제를 해결해 낸 것이다.
수전은 더 이상 집 있는 사람을 부러워하지 않는다. 은행 대출 없이 집을 얻었고 마음의 평화를 되찾았다. 12살 레이첼은 맨발로 온 동네를 내집 드나들 듯 자유로운 시간을 보내고, 스페인 출신의 제롬과 일본인 시호 가족은 더 이상 월세집에서 쫒겨날 위험 없이 둘째의 출산을 기다리고 있다. 이들이 이구동성으로 이야기하는 평화와 행복이 그동안 투기대상으로 전락한 집으로부터 빼앗긴 것들이 아니었을까? 있는 사람은 있는 사람대로 없는 사람은 없는 사람대로 이웃 공동체와 누리는 인간다운 삶, 행복할 권리를 잃고 있었던 것 아닐까?
주류전략
주류전략
결국 '관계'에 관한 이야기다. 그런데 어떤 이는 딱 잘라 '관계는 불편한 것'이라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사회적 의미도 좋고 인간적인 면도 좋은데 사적인 필요가 충족되고 나면 관계는 쉽게 느슨해 진다. 내 가족과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는 것도 힘든데 여러 이웃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며 사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고 결국 에너지 낭비라 생각할 수도 있다. 현실에서 틀린 말은 아니지만 어쩌면 그런 현실은 그동안 우리가 협동, 협력하는 법을 배우지 못한 때문일 수도 있다.
150년 전 런던에서 근대적 보통교육이 처음 시작될 때, 학교는 '시장'이 요구하는 노동자, 국가의 부름에 응하는 '국민'을 양성하는 기관이었다. 도시로 밀려드는 노동자의 아이들을 맡아, 학교는 근대 민족 국가의 생존 캠프로서의 의무를 부여 받았다. 그런 학교가 지금까지 대부분의 국가에서 온전히 그대로다. 우리는 학교에서 협동을 배우지 못했다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 그래서 교육혁신이다. 교육에서 혁신의 요체는 경쟁체제의 학교를 더 사나운 경쟁으로 줄세우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교실에서 어떻게 협동을 가르칠 것이며 그에 따른 학교의 체질, 체제는 어떻게 바뀌어야 하는가의 질문에 있다.
사람들은 개인적으로 경쟁하는 법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사회적으로 협동하는 것은 또 다른 기술입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사람들의 사적인 삶은 항상 경쟁 속에 있습니다. 그러니 경쟁하는 법을 일부러 배울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는 취업 시장에서 경쟁이라는 것을 알게되죠. 하지만 협동으로 사업을 만드는 일은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저는 효과적인 협동을 가르치는 것이 학교의 핵심 기능이라고 말하겠습니다. - 로빈 머레이
흔히 협동조합은 소규모 점포 수준의 일이 될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초거대 규모의 글로벌 경쟁을 앞에 두고 협동조합식 경영, 조직운영이 작동할 수 있을까 의구심부터 갖는다. 그러나, 한 해 매출 규모 16조원에 이르는 영국 '협동조합그룹(The Co-operative)'의 예를 들지 않더라도, 스마트한 소비자, 복잡다단한 시장의 요구에 대응하기 위해 21세기 기업이 갖추어야 할 역량은 무엇일까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수십만의 직원을 거느린 글로벌기업이 역량을 집중하는데 필요한 방법과 그 구성원의 덕목은 무엇일까? 애플은 애플 생태계를 구성하는 개발자의 협력없이 존재할 수 없고, 구글은 세계 곳곳 프로슈머의 협력없이 경쟁할 수 있을까? 지나친 내부경쟁과 독점이 기업의 성장 가능성을 파괴하는 예는 너무도 많다. 지금은 협동 역량을 경쟁해야 하는 시대다. 모르는 사람들과 같은 목표를 나눌 줄 알고, 원거리의 커뮤니케이션에도 쉽게 공감할 줄 아는 사람이 진짜 필요한 사람이다.
규모가 커졌기 때문에 더욱, 21세기형 직무역량과 19세기형 학교의 괴리는 더 커졌다. 그러나, 150년 이상 경쟁만 가르쳐온 학교가 협동을 어떻게 가르쳐야 할까 묻는다면 쉬운 일은 아니다. 30년 가까이 시험만 쳐서 교사가 된 선생님, 교육부에서 내려다 주는 권위적 커리큘럼, 학교와 학교간의 경쟁에 내몰린 교육행정 그리고 경쟁사회의 일원으로 길들여진 학부모를 그대로 두고 협동교육은 작동하기 어렵다. 협동조합학교가 학교 자체의 소유구조, 거버넌스를 바꾸는 시도에까지 나아간 이유가 여기에 있다. 협동조합학교는 학교에 관한 150년 사람들의 상식을 바꾸는 운동이다. 대안학교 설립운동이 아니라 공립학교를 바꾸는 주류운동이다.
우리는 처음부터 협동의 아이디어와 '협동조합학교'를 공교육의 주류로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변화를 만들어내고 싶다면, 단순히 변방의 비주류에 머물러서는 안되는 것이지요. - 머빈 윌슨
호세 마리아(José María Arizmendiarrieta) 신부가 스페인 몬드라곤 협동조합에 대해 '경제행위를 결합한 교육운동'이라 했듯, 협동조합이 지켜온 가치들은 경제조직으로서 협동조합을 유지하기 위한 원칙이 아니라 더 나은 세계를 위해 시민이 지켜야할 가치관에 가까운 것이었다. 로치데일 협동조합 역시 단순한 식료품 소매사업이 아니라 조합원의 일상 전반에 협동하고 협력하는 문화를 심는 교육활동이고 사회혁신 운동이었다. 영국의 협동조합학교가 커뮤니티와 학교를 잇고 교직원과 학생을 잇는 협치의 거버넌스를 채택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렇게 학교는 협동조합이 되었다. [협동조합은 학교다.]
어느 동료가 처음 협동조합학교 모델을 보고 제게 해준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는 “지금 당신이 개발하고 있는 협동조합학교 모델은 커뮤니티학교에 커뮤니티를 돌려주고 있는 거군요”라고 하더군요. 왜냐하면 영국에서는 지자체가 운영하는 공립학교를 통상 커뮤니티학교라고 불러왔거든요. 하지만 정작 그런 커뮤니티 학교의 운영에 지역 공동체가 참여하는 기회는 아주 제한적이었죠. 협동조합학교는 지역공동체를 학교 운영에 참여시켜 지속가능성을 높일 수 있는 학교운영구조를 제공합니다. - 머빈 윌슨
공공서비스 혁신에 관하여
공공서비스 혁신에 관하여
유수의 사회개혁가들의 후원으로 시작된 보통교육 정책, 공교육은 어쩌다 이 모양이 되었을까? 반복되는 도시와 주거 문제를 왜 여태 효과적으로 해소해내지 못하는가? 왜 공공서비스의 비용은 늘어나고 품질은 저하하는가? 정권의 교체가 일정한 압력이 되고 정부의 자정 역량을 높일 수는 있다. 하지만 국가의 근본을 이루는 구조와 운영시스템은 조직 안정화의 방향으로만 움직이지 그 역(逆)은 없다. 정책 우선순위에 따라 부서가 통폐합 또는 독립되고 이름이 바뀔 수는 있겠지만 시스템은 선거와 관계없이 견고해지고 보수화 된다. 이제 혁신은 그 안정 지속 상태(state) 자체에 대한 문제제기, 즉 국가(State)의 존재와 역할에 대한 근본적 변화를 요청하는 지점에까지 이른다.
지금이 그런 혁신이 요청되는 시기다. 에드 마요(Ed Mayo) 영국협동조합연합회 대표의 주장처럼 오늘날 국가는 새로운 정통성을 요청받고 있다. 그의 말을 들어보자.
제도와 절차의 민주주의가 성숙되면 계약으로서의 국가라는 관념이 확대된다. 유럽의 복지국가는 국가와 시민이 맺은 복지, 공공서비스라는 사회계약이었다. 사회 안전과 공공의 복리를 지키는 국가의 역할을 부여하고, 4-5년에 한 번, 주권자로서 이를 대행할 일군의 정치세력을 대리자로 임명한다. 에드 마요가 말하는 대표성(constituency)의 위기란 그러한 국가-서비스제공자, 시민-사용자의 이분 체제가 작동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시민사회로부터 동떨어진 국가의 위상을 인정하는 순간, 정교해지는 관료사회로부터 주권자의 소외는 불가피해진다. 열정(morale)은 식고, 약속은 법률과 예산에 묻혀 잊혀진다. 세금으로 비용을 대는 시민 입장에선 계약의 효용을 근본적으로 따져 묻는 상황으로 내몰릴 수 밖에 없다. '호혜적 국가'(Mutual State) 개념은 이러한 한계상황에서 나온 새로운 사회계약의 아이디어다.
새로운 정부의 비전은 시민에게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시민과 함께하는 협력에 기반하고 있다. 간단히, 시민 스스로 또는 이웃과 다른 공동체가 직접 공공서비스를 디자인하고 집행하는 핵심 역할을 맡는 것이다. - 에드 마요, "The Mutual State ; How local communities can run public services", by Ed Mayo and Henrietta Moore
문제는 이때 '파트너'로서 ‘시민’을 어떻게 정의할 것인가? 하는 점이다. 국가 또는 그 서비스를 운영하기 위해선 자원이 필요하고 그 자원을 재배치할 때 어떤 주체에게 무슨 근거로 역할을 부여할 것인가? 그것은 공공서비스의 민영화와 무엇이 다르고 그 건강성은 어떻게 지속할 수 있을 것인가? 이 질문들에 구체적으로 답할 수 없다면 뮤추얼 국가의 개념은 공염불에 불과해 진다. 우리가 로치데일 상호주택조합(Rochdale Boroughwide Housing, RBH) 사례에 주목한 것은 그 때문이다.
RBH는 원래 구청이 소유한 임대주택의 위탁관리를 위해 2002년에 만들어졌다. 구청이 소유한 공기업이라는 점에서 구청이 직접 관리했던 이전과 본질적인 차이는 없었다. 2009년부터 진행된 거버넌스 개편 논의의 핵심은 주민 참여 제고 방안이었다. 마침내 2012년, 수년간 지속된 회의의 결과 로치데일 구청은 구청이 가진 모든 임대주택의 소유권을 아예 이 위탁관리 회사 RBH로 넘긴다. RBH는 주민과 종업원 그리고 구청이 함께 이사회를 구성하는 상호조합이 되었다.
여기서 마법이 작동한다. 아파트 관리사무소와 같은 일개 위탁관리회사에 불과했던 회사는 자산가치 수십조에 달하는 13,400개의 집을 소유하고 600명의 상근 직원을 거느리며 무려 천억원에 이르는 한 해 매출을 기록하는 초대형 기업이 된다. 기존 주택의 관리를 넘어서 지역을 위한 투자 기회를 발굴하고, 그에 따라 자산을 개발하고 재배치하는 권한까지 갖게 된 것이다. 지역의 이해관계자들이 머리를 맞대어 번영을 도모하고, 그 이익은 다시 공동체로 귀속되는 선순환 구조가 갖춰졌다.
민주적이면서도 효율적인 조직운영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어쩌면 꿈같은 일이고 어쩌면 끊임없는 반성의 프로세스 그 자체 일 수도 있다. 2012년 소유권 이전 이후 거버넌스 구조는 지속적인 실험과 리뷰를 반복하고 있다. 특정 부문, 특정 소수의 전횡은 없을까? 주민, 종업원, 구청처럼 이해관계가 부딛히는 조직의 지속가능성은 어떻게 보장할 것인가? 민주주의와 협동의 열정은 유지할 수 있을까? RBH의 이사, 대표자 연석회의를 들여다 보자.
이 회의엔 구청CEO가 직접 참석해 구청의 재정상황, RBH와 구청의 관계를 설명하고 약 2시간에 걸쳐 주민대표, 종업원 대표들과 질의 응답이 진행되었다. 영국에서 구청의 CEO는 선출직 공무원이 아니라 한국의 큰 지자체의 행정부시장과 같은 최고위급 공무원이다. 그러나 의원내각제를 채택하고 있는 영국에서 지자체 행정조직의 CEO는 선출직 의원들의 대표(한국의 경우 구청장 또는 의회의장)보다 더 강력한 집행 권한, 조직 장악력을 갖는 경우가 많다.
로치데일은 세계 최초로 협동조합의 아이디어가 성공한 도시다. 협동조합의 이름부터 로치데일 '공정선구자' 조합 이었다. 그 역사성을 이은 RBH가 선도하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뮤추얼(mutual, 상호 또는 호혜로 번역한다)' 협동이다. 과거의 협동조합이 '소비자' 협동조합과 같이 이해를 같이하는 일부문의 조직에서 출발했다면 뮤추얼, 상호조합은 서로 다른 이해관계를 가진 조합원을 포괄하는 협동조합이다. 다름 속에 공통의 가치와 이해를 발견하는 차원 높은 '사회적 경제' 또는 호혜적 경제다.
거버넌스, 협치(協治)가 운위되는 것도 이 지점이다. 협치는 단순히 권한을 나누어 주는 시혜적인 것이 아니다. 구청의 자산 이양(transfer)은 소유권의 일부를 떼어주는 것이 아니라 소유권의 성격, 작동방식을 재구성하는 것이었다. 협치는 너-나-우리 모두가 바뀌어야 하고 일의 가치, 목표, 프로세스 등 시스템 전체를 새롭게 설계하는 일이다. 입주민(사용자), 종업원(서비스제공자), 카운슬(국가)이 함께하는 RBH의 실험이 진정한 사회혁신, 사회적경제의 가능성으로 주목받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관계의 복원
관계의 복원
영화 ‘나, 다니엘 브레이크(I, Daniel Blake, 켄 로치 감독, 2016년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의 배경은 영국 뉴카슬(Newcastle)이다. 심장 이상으로 목수 일을 할 수 없는 처지인데도 불구하고 그의 질병급여 신청은 반려된다. 복지국가는 의학적 소견도 아닌 까다로운 급여 신청서류와 점수로 다니엘을 평가한다. 실업급여도 마찬가지다. 국가는 ‘편리한’ 인터넷으로 서류를 제출하라지만 그는 컴퓨터를 다룰 줄 모른다. 사회계약은 작동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를 돕는 이는 쓰레기도 버릴 줄 모르는 밀수꾼 옆집 청년이었다. 전열비가 밀려 가구까지 다 처분해야 했던 다니엘 역시 주거비 비싼 런던에서 잉글랜드 북쪽 끄트머리 뉴카슬까지 밀려난 케이티와 그 아이들을 돕는다.
영화는 제도와 규정으로 틀어막힌 행정과 이웃과 시민의 상식적 연대를 대조(對照)한다. 유불리의 계산없이 인간 존엄과 생명을 지켜주려 한 것은 국가가 아니라 이웃이었다. 수십년 세금을 바친 복지국가가 외면할 때 이들 평범한 사람들을 움직이는 힘은 무엇일까? 과연 그것은 '예외적'인 선행일 뿐일까? 마지막 장면, 다니엘이 남긴 선언에 ‘함께’ 감동할 수 있다는 것은, 그것이 보편적 상식에 부합하기 때문이 아닐까? '이기적 경제인' 이라는 통념에 사로잡혀 충분히 윤리적일 수 있는 경제를 애써 외면해 왔던 건 아닐까?
칼 폴라니(Karl Polanyi)는 이윤 동기가 지배하는 경제 매커니즘이 장악한 19세기 이후 서구문명을 거대한 전환(The Great Transformation)으로 표현했다. 그리고 이를 문명사에 유례를 찾기 힘든 특이한 시대라 말한다. 이전엔 달랐다는 것이다. 지난 200년 이전 시대 수십만년 동안 인류는 나름대로 호혜적인 질서를 발전시켜왔다. 이윤이 아니라 필요에 따른 생산과 공동체의 생존을 위한 자원의 재분배도 윤리적으로 구축되고 있었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자본주의 이전 뿐만이 아니다. 자본주의 내부에도 그만한 균열은 늘 존재했다. 협동조합이 그러하듯, 자본주의가 한창일 때도 자본주의 아닌 시스템은 곳곳에서 실험되고 실제 효과적으로 작동한 예는 많다. 심지어 금융도 예외가 아니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아이디어에는 그만한 이유와 배경이 있다. 자본주의는 '투자'라는 '꿈'의 기술로 선전되었다. '메리 포핀스(Mary Poppins)'라는 영국 동화(디즈니의 뮤지컬로도 각색되었다)에도 나오듯, 아프리카의 철도, 나일강의 댐, 대양의 선박과 운하의 건설이 자본주의의 작동으로 가능했다. 은행과 보험의 거리, 런던은 그렇게 세계의 중심이 되었다. 그 자본의 기술을 '모두'의 꿈으로 바꾸면 어떠한가?
애슐리 베일(Ashley Vale) 사례가 시사점을 주는 것은 이 지점이다. 공동체의 힘으로 난개발을 막고, 자금과 아이디어를 모아 그들만의 새로운 마을을 건설한다. 협동조합이어도 좋고 아니어도 좋았다. 개인은 개성을 지키되 개인주의적이지 않다. 모험에 용기를 주고 경험을 바탕으로 새로운 비지니스를 창안하며, 미래를 보고 이웃 공동체를 지원한다. 브리스톨 공동체 토지신탁(BCLT)의 셀프피니시 매니저로 등장했던 잭슨 몰딩의 마을, 애슐리 베일 이야기다.
영국의 사회혁신은 저항의 운동이라기보다 기업가 정신에 충만한 '사회사업'으로 보인다. 이들은 밖에서 답을 찾지 않는다. 정치에 전부를 걸고 전복을 기다리며 시간과 정력을 낭비하지 않는다. 상상하기 어려운 미래, 존재하지 않는 세계에 대한 낙관이 아니라 지금 당장 실천에서 새로운 방법, 새로운 비지니스 모델을 찾는다. 작은 아이디어라도 미래사회 전체를 걸고 투자할 수 있도록 캠페인을 벌인다.
그동안 자본주의의 문제는, 사유 재산에 기초한 경제, 사회 운영 시스템의 문제다. 가진자 만이 그 가진 것(資)을 근거(本)로 자원을 독점하는 구조다. 빈익빈부익부는 이 시스템이 작동하는 방식을 그대로 반영한 결과에 불과하다. 그러나 돈을 부정하는 것으로 돈이 성취한 모든 것을 파괴해 버릴 수는 없다. 자본(資本)을 ‘돈의 문제’ 로만 해석한다면 부족한 면이 있다. 금융은 문명의 기술이다. 19세기의 철도, 항만, 운하 뿐아니라 오랜 시간의 과학적 분석이 필요한 의료장비, 다수의 협력이 필요한 첨단 소프트웨어는 수단으로서 화폐의 기능, 장기 투자와 회계시스템 없이 실현 가능하지 않다.
물론, 국가가 그런 투자를 대신할 수도 있다. 그러나 국가가 세금을 거두어 부를 재분배하거나 재정을 통해 주택을 공급하는 경우에도 사적소유, 이윤동기의 원리가 지금과 같은 수준으로 유지되는 한 한계는 분명하다. 국가 자체를 사적으로 소유하고 국가에서의 지위를 또다른 자본으로 활용하는 관료주의, 지대추구(rent-seeking)로부터 벗어날 수가 없다. 복지국가가 작동을 멈추는 지점이다. 기를 쓰고 공무원이되고자 하는 청년들의 몸부림은 지위가 자본이 된 시대의 불온한 자화상이다.
상호부조, 호혜적 미래는 하나의 해법을 제시한다. 가치를 나누는 공동체가 자본을 가질 수 있게 하자는 것이다. 신용은 사적 자산에만 보장하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의 가치, 필요, 신념과 의지에도 돌아갈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자본을 호혜적인 방식과 목표에 쓰도록 국가가 보장하고 지원한다. 국가는 공동체의 보증인이며, 자산화와 공동번영을 촉진하는 새로운 역할을 부여받는다.
이 새로운 국가의 새로운 민주주의는 이기적 개인을 다수결로 '지배'하는 제도가 아니라 잠재된 호혜성을 발현시키는 긍정의 에너지로 작동한다. ‘미국의 민주주의’를 쓴 토크빌(Alexis Tocqueville)은 민주주의가 단순한 대중의 지배 이상의 것이 되려면 민주적 상호부조의 정신(Democratic Mutual Aid Spirit)이 있어야 한다고 보았다. 이에 반해 자유시장경제는 과도한 개인주의에 경도되고 국가에 대한 수동적 자세, 정치적 무관심을 낳는다고 비판한다. 협동할 줄 아는 새로운 민주주의는 이미 오래전에 토크빌이 간파한 민주주의 본래 정신을 되살리는 것이다.
이 프로젝트를 통해 우리는 위대한 변화가 이미 곳곳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을 확인했다. 영국의 로컬리즘법, 스코틀랜드 토지개혁의 취지가 공동체 자산화에 있고, 웨일즈 정부, 로치데일 구청이 때론 수십조에 달하는 주택소유권을 넘기는 것도 공동체의 역량을 믿고 스스로 번영을 모색할 기회를 터주는 것이었음을 확인한다. BCLT의 주민과 협동조합학교의 학생, 학부모 그리고 RBH 조합원과 에슐리베일의 셀프빌더까지 이들은, 협동의 모델로 지역과 사회, 나아가 국가를 새롭게 디자인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