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사람들은 공사 현장 하면 안전모, 철골, 크레인 등을 떠올릴 것이다. 그런데 영국 런던의 한 재개발 현장에는 조금 특별한 것이 있다. 공사 현장에서 이용하는 커다란 쓰레기 덤프통에 만든 이동식 정원이 그것이다. 영국에서는 스킵(Skip) 이라고 부르는 이것은 우리나라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덤프 트럭에 실리는 커다란 쓰레기통을 말한다. 건설 현장에서는 이 커다란 쓰레기통에 폐기물을 모아 처리장으로 이동한다. 그러나 런던 킹스 크로스 재개발 현장의 이 덤프통에는 쓰레기 대신 흙이 담기고 갖가지 과일과 야채들이 자라고 있다.
런던 중심으로부터 북동쪽, 두 기차역 세인트 판크라스(St. Pancras)역과 킹스 크로스(King's Cross)역이 만나는 킹스크로스 지역은 조지안 시대(18세기)에는 온천이었고 빅토리안 시대(19세기)에는 공장과 물류 창고로 쓰였다. 그러던 것이 20세기 이후, 특히 2차세계대전이 끝난 후에는 역사(驛舍)에 필요한 야적장으로만 이용되었을 뿐 토지 활용도가 현격히 떨어진다. 노숙자들이 모여들고 마약거래와 범죄율이 높아 지역 이미지는 더욱 나빠졌다. 드디어 2000년, 토지 소유주인 런던 콘티넨탈 레일웨이와 DHL 로지스틱스가 이 지역 재개발 추진을 결정한다. 그들이 지명한 개발업자를 중심으로 런던시청과 구청, 주민, 주변 상인들 사이의 토론과 협상은 무려 5년 동안 이어졌고 마침내 2006년, 마스터 플랜이 완성되었다. 그 이듬해 2007년, 워털루에서 킹스 크로스로 이동한 유로스타(유럽 국제선) 역사가 촉매제가 되어 지금까지 10년째 단계별로 공사가 진행 중에 있다. 에너지 기반시설 공사를 선두로 순차적으로 학교, 아파트, 공원, 상업 시설 등이 들어서 2020년 경 완공 될 예정이다.
스킵 가든이 이 곳에 자리한 지도 벌써 10년에 가깝다. 지금은 가드너이자 교육자로 일하고 있는 폴 리첸스(Paul Richens)라는 사람의 아이디어로 시작된 이 프로젝트는 글로벌 제너레이션(Global Generation) 이라는 커뮤니티 단체를 통해 운영된다. 8만 2천 평에 달하고 공사 기간만 15년이 넘는 런던에서 가장 큰 도시 재생 현장에서 스킵가든은 주민들과 공사 현장에서 일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오아시스' 같은 존재다. 스킵 가든의 가장 큰 장점은 이동이 가능하다는 점이다. 일곱 개의 스킵은 공사 진행과 땅의 소유권 변화에 따라 비어 있는 부지로 옮겨가며 삭막한 현장을 푸르게 디자인 한다. 실제로 지난 10년 동안 스킵가든은 세 번의 이사를 했다.
스킵에 담는 흙은 오염될 수도 있는 공사 현장의 것 대신 다른 곳에서 가지고 오지만 스킵 가든을 구성하는 많은 재료들은 대부분이 공사 현장에서 나오는 재활용품들이며 자연 친화적으로 디자인 되어 있다. 지렁이를 키워 직접 비료를 만들고 농작물들을 교대로 심으며 빗물을 모아 농작물에 줄 수 있는 시스템도 갖추고 있다. 가든에 심는 농작물의 선정도 특별하다. 스킵 가든을 만든 폴은 대형 슈퍼의 확장 때문에 다양한 종류의 농작물들이 사라진다고 생각했다. 대형 슈퍼에서 취급하는 과일과 채소의 우선 선정 조건은 저장과 유통의 편의성이다. 그래서 멍이 쉽게 들거나 빨리 상하는 토종 과일과 채소 품종들은 그 풍미에도 불구하고 우리들 식탁에서 점점 사라져 간다는 것이다. 스킵 가든이 가능한 사라져 가는 다양한 품종들을 되살리고자 하는 이유다. 그렇게 생산된 과일과 채소들은 스킵 가든에서 운영하고 있는 카페를 포함해 주변 식당으로 공급된다.
스킵 가든의 가장 큰 역할은 주민 참여와 커뮤니티 형성이다. 글로벌 제너레이션에서 운영하는 어린이와 청소년을 위한 프로그램에는 킹스 크로스 주변 많은 학교의 아이들이 참여하고 있다. 이 프로그램은 ‘나, 우리 그리고 지구’ 라는 주제로 아이들이 지속가능한 환경을 고민하고 가든 프로젝트를 통해 직접 체험 할 수 있도록 한다. 아이들은 삭막한 공사 현장 한 구석을 차지하고 있는 스킵 가든에서 과일과 채소의 씨를 뿌리고 가꾸면서 인공적인 환경 속에 자연이 주는 소중함을 깨닫는다.
글로벌 제너레이션 사람들은 스킵 가든을 ‘수천 개의 손에 의해 가꿔 지는 가든’이라고 부른다. 요일 별로 또는 짬 날 때마다 사람들은 가든에 와서 물을 주고 잡초를 뽑고 동네 사람들을 만난다. 스킵 가든과 같이 운영되는 가든 카페는 아이들을 데리고 오는 엄마들에게 특히 인기가 많은 동네 사랑방이다. 공사 현장에서 일하는 사람들도 안전모를 쓴 채로 가든 카페를 찾아 잠시 커피 한 잔의 여유를 즐긴다. 올해는 런던대학교 건축학과 학생들이 스킵 가든에 그들이 디자인한 구조물을 설치하는 작업을 했다. 스킵 가든이 런던의 혁신적인 아이디어와 예술까지 끌어들이고 있는 것이다. 학생들의 독특한 작품과 가든이 어우러져 공사 현장은 더이상 시끄럽기만 한 공사판이 아니다.
많은 기관, 단체 그리고 사람들이 스킵가든을 지원하고 있다. 킹스 크로스 개발 주체로서 스킵 가든에 땅을 빌려 주고 있는 킹스 크로스 파트너쉽, 캄덴(Camden)과 이슬링턴(Islington) 구청, 복권 기금 등 많은 기업, 관공서 그리고 개인들의 후원금으로 이 가든은 운영되고 있다.
일곱 개의 스킵으로 만들어진 이 정원은 8만 평이 넘는 킹스 크로스 재개발에서는 아주 작은 프로젝트일 수 있다. 하지만 이 작은 프로젝트가 지역 주민들과 사람들을 끌어들이는 힘은 그 규모에 비할 바 아니다. 이제는 공사 구간 밖의 기업과 상인들 또한 그들이 지역 주민들과 무엇을 함께 할 수 있을지 먼저 고민한다. 무엇보다 장기간 지속되는 재개발 과정에서 자연을 상기시키고 지속 가능한 개발이라는 숙제를 끊임 없이 고민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는 점에서 스킵 가든은 진정한 '도심 속 오아시스'다. 주민을 쫒아내는 재개발이 아니라 주민과 함께하는 도시 재생의 과정, 회색 콘크리트로 뒤덮인 건설현장에서 한 줌 흙이 주는 소중함을 이 쓰레기 덤프통, 스킵 가든이 가르쳐 준다.
글: 김미경 선임연구원 사진: Global Generati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