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공(公共, public)이란 말은 정부-국가(state)에 가깝게 들릴 수도 있고, 사람-대중(people)에 더 가깝게 들릴 수도 있다. 복지국가의 꿈을 꾼 이들에게 '공공'은 대체로 '국가'로 이해되었을 것이다. 그들에게 '공공' 서비스는 국가가 시민에게 해주어야 할 '의무' 같은 것이다. 그런데 그 국가가 기대했던 것 만큼 효율적으로 작동하지는 않는다. 시장경제의 서비스 민감도에 비하면 한참은 뒤떨어 진다.
너그럽게 보자면, 1980년대 이후 보수-시장주의는 국가에 부담한 돈(세금)의 값어치에 대한 합리적인 의심을 바탕으로 한 것이었다. 그런데 그렇게 '능력 없는' 국가라면 시장(market)이 제대로 돌아가도록 감시역이나 제대로 했으면 좋았을 텐데 그것조차 못해낸다. 이제는 국가가 시장의 포로가 되어버린 것이다. 2008년 금융위기는 그 결과였다. 한마디로 우리가 원하는 것은 '큰 정부'도 '작은 정부'도 아닌, 지금 제대로 작동하는(work) 국가다. 그래서 '공공'은 '국가'에서 '사람' 쪽으로 급격히 이동하는 중이다.
그런 맥락에서 호주의 한 사회혁신 프로그램을 들여다 보자. 호주사회혁신센터(The Australian Centre for Social Innovation)가 시민들과 함께 디자인(co-design)하고 개발한 공공서비스 모델, [패밀리 바이 패밀리]다.
기본적으로 이 프로그램은, 과거 어려운 환경을 경험한 멘토 가족들(Sharing Families)과, 현재 어려움을 겪고 있지만 변화를 원하는 가족들(Seeking Families)을 연결해 주는 것을 골격으로 한다. 편부모 가정, 장애인 가족 등 공동체로부터 소외되기 쉬운 가족들에 대해 기존의 복지 정책이 '시혜자'의 위치였다면 [패밀리 바이 패밀리]는 이들 경험을 공유하는 가족들이 함께 해결책을 만들어 갈 수 있도록 동기를 부여하고, 커뮤니티를 형성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지원하는 퍼실리테이터(facilitator)의 역할을 담당한다.
보통 두 가족들이 짝을 이루는 과정은 '스피드 데이팅'처럼 이루어진다. 흔히 [패밀리 바이 패밀리]로 연결되는 루트는 호주 아동보호국의 추천이다. 이들의 추천을 받은 가족으로부터 연락을 받은 [패밀리 바이 패밀리]의 '가족 코치'는 여러 가지 이유로 양육권을 아동보호국에게 뺏길 위험에 처한 가족들에게 프로그램에 참여한 멘토 가족들(Sharing Families)의 프로파일을 보여준다. 공공서비스의 수혜자들 즉, 변화를 원하는 가족들(Seeking Families)에게 변화의 선택권을 먼저 주는 것이다.
기존의 사회복지 프로그램이 서비스 공급자의 입장에서 설계되었다면 [패밀리 바이 패밀리]는 처음부터 끝까지 수용자 가족이 경험하는 과정을 따라 그들의 입장에서 설계되었다. 여기서 가족이란 성인에 국한되지 않는다. 가족 구성원 모두를 능동적인 참여자로 보는 [패밀리 바이 패밀리]는 아이들을 대하는 방식도 다르다. 아이들도 멘토 가족 선택과정에 참여할 수 있도록 [패밀리 바이 패밀리]를 설명하는 동화책을 함께 읽어 주며 아이들의 적극적인 발언권을 이끌어 낸다. 부모들의 자녀 양육방식 문제에 초점을 두기보다, 가족관계 전체를 고려하는 것이다.
변화를 원하는 가족(Seeking Families)이 멘토 가족을 선택하게 되면, 두 가족은 짝을 이루어 10~30주 동안 일주일에 한 번씩 만난다. 이 만남을 '링크-업(link-up)'이라고 부르는데, 함께 운동을 하거나 캠핑을 떠나기도 하고, 자원봉사에 참여하는 등 커뮤니티 이벤트에 참여하기도 한다. 링크-업은 가족 간 친밀한 관계를 만들기도 하지만, 관계를 넘어서 가족들의 행동 변화에 초점을 두고 있다. 보통 이는 세 단계를 거치게 된다.
첫째 단계는 변화를 원하는 가족과 멘토 가족 간 신뢰를 쌓는 과정이다. 둘째 단계는 '함께하는 단계(doing with)'이다. 가정 안에서 언어폭력이 문제가 되는 경우, 하지말라고 조언만 하기보다, '같으면서도 다른' 경험을 나누는 멘토 가족은 변화를 원하는 가족이 이 새로운 행동을 정착할 수 있을 때까지 옆에서 본보기를 보여준다. 셋째 단계는 '혼자 해내는 단계(doing without)'이다. 변화를 원하는 가족이 자신감을 쌓아 도서관, 클럽, 아동센터, 자원봉사 등 커뮤니티 안에서 일어나는 활동에 참여할 수 있도록 용기를 북돋아 준다. 관계가 또 다른 관계로 이어지면서 사람들을 치유해 나가는 것이다. 평균적으로 80%의 가족들이 자신들이 설정한 목표를 달성해 냈다.
[패밀리 바이 패밀리]를 운영하는 호주사회혁신센터(TACSI)의 대표 캐롤린 커티스(Carolyn Curtis)는 '이 프로그램의 핵심은 그들이 시작하고 싶은 곳에서 시작하는데 있다'고 강조한다. 해결책은 전문가가 일방적으로 문제를 판단하고 도출해 내는 것이 아니라, 가족들끼리 동행하며 스스로 문제를 깨닫는 과정 속에 해소되는 것이라 믿는다. 그러나 [패밀리 바이 패밀리]의 스텝과 코치들은 두 가족 간의 만남을 주선하고 그들이 몇 번 만났는지 횟수만 세며 자연스럽게 해결책이 생기겠지라고 결과를 가정해버리지 않는다. 이들은 가족들의 행동변화 과정을 세밀하게 분석하고, 이해하려고 노력한다. 시나리오를 세우고 가설들을 검증하고 기록한다. 가족들과 창의적인 프로그램을 개발하며 그 프로그램에 필요한 자료들을 함께 만든다.
[패밀리 바이 패밀리]는 올해부터 호주 전역으로 확산될 예정이다. 프로그램을 설계하고 이끌어온 '호주사회혁신센터'는 스스로 덩치를 키우기보다 이미 네트워크를 갖춘 유니팅 커뮤니티스(Uniting Communities) 와 베네볼렌트 소사이어티(Benevolent Society)라는 두개의 비영리 기관들과 파트너십을 맺는 방식을 택한다. 정책 기관의 규모가 공공서비스 수준을 증명하는 것은 아니다. 정책이 좋고 프로그램이 좋다고 언제 어디서나 잘 작동하는 것도 아님을 이들을 잘 알고 있다.
국가는 더이상 '은혜를 배푸는 중심'이 아니라 각 관계들이 공유하는 하나의 '질서'에 가깝다. 20세기에 등장한 '복지국가'의 이상은 아름다운 것이었다. 하지만 복지를 교조적으로만 이해하면, 그 속에 시민은 국가 서비스의 일방적 '수혜자'에 불과할 수도 있다는 점에서 누구나 소비자이면서 공급자가 될 수 있는 지금의 경제와는 어울리지 않는다. 복지서비스가 '국가-공급자' 중심에서 '사람-수용자' 들의 관계로 새롭게 디자인되는 이유다. 그리고 그 속에 혁신적이고 전문적인 중간조직, 비영리 기관들의 역할이 선명하게 드러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