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 '관계'에 관한 이야기다. 그런데 어떤 이는 딱 잘라 '관계는 불편한 것'이라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사회적 의미도 좋고 인간적인 면도 좋은데 사적인 필요가 충족되고 나면 관계는 쉽게 느슨해 진다. 내 가족과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는 것도 힘든데 여러 이웃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며 사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고 결국 에너지 낭비라 생각할 수도 있다. 현실에서 틀린 말은 아니지만 어쩌면 그런 현실은 그동안 우리가 협동, 협력하는 법을 배우지 못한 때문일 수도 있다.
150년 전 런던에서 근대적 보통교육이 처음 시작될 때, 학교는 '시장'이 요구하는 노동자, 국가의 부름에 응하는 '국민'을 양성하는 기관이었다. 도시로 밀려드는 노동자의 아이들을 맡아, 학교는 근대 민족 국가의 생존 캠프로서의 의무를 부여 받았다. 그런 학교가 지금까지 대부분의 국가에서 온전히 그대로다. 우리는 학교에서 협동을 배우지 못했다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 그래서 교육혁신이다. 교육에서 혁신의 요체는 경쟁체제의 학교를 더 사나운 경쟁으로 줄세우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교실에서 어떻게 협동을 가르칠 것이며 그에 따른 학교의 체질, 체제는 어떻게 바뀌어야 하는가의 질문에 있다.
"People know how to be individually competitive, but how to be socially co-operative is a different art. After all in peoples’ private lives, they are within competition in the whole time in capitalist society. They don’t need to learn about that. They know about it in the job market, but how to create co-operatives is a different thing. So that I would say the main function of a school will be how to teach effective co-operation." - Robin Murray
사람들은 개인적으로 경쟁하는 법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사회적으로 협동하는 것은 또 다른 기술입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사람들의 사적인 삶은 항상 경쟁 속에 있습니다. 그러니 경쟁하는 법을 일부러 배울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는 취업 시장에서 경쟁이라는 것을 알게되죠. 하지만 협동으로 사업을 만드는 일은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저는 효과적인 협동을 가르치는 것이 학교의 핵심 기능이라고 말하겠습니다. - 로빈 머레이
영국에서 근대적 보통교육은 1870년 초등교육법이 통과되면서 시작되었다. 런던에선 'London School Board(LSB)'가 설치되어 런던 전역에 일제히 국민학교를 짓기 시작한다. 직선으로 선출된 교육위원들 중에는 여성도 있었다. 당시가 여성에게 투표권(영국에서 여성에게 투표권이 주어진 것은 1차세계대전이 끝난 1920년대다)이 주어지기 훨씬 전이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비밀보통선거의 원칙을 적용한 이 학교위원회는 강성한 대영제국의 자신감, 사회개혁에 나섰던 자선사업가(philanthropist)들의 진취적, 계몽적 사고의 산물이었다. 위 그림 The First London School Board (136 x 215 cm. oil on canvas)는 John Whitehead Walton (1815-95)의 1873년 작품이다. 그림에서 테이블 너머 두명의 여성이 보이는데 서있는 사람이 영국 최초의 여성 의사이자 서브러제트(Suffragette 여성참정권운동)의 리더였던 엘리자베스 앤더슨(Elizabeth Garrett Anderson)이라 알려진다. 임기 3년의 첫 LSB에서 그녀는 최다 득표 위원이었다. 소장, Guildhall Art Gallery, London.
The Co-operative School, 협동조합학교
흔히 협동조합은 소규모 점포 수준의 일이 될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초거대 규모의 글로벌 경쟁을 앞에 두고 협동조합식 경영, 조직운영이 작동할 수 있을까 의구심부터 갖는다. 그러나, 한 해 매출 규모 16조원에 이르는 영국 '협동조합그룹(The Co-operative)'의 예를 들지 않더라도, 스마트한 소비자, 복잡다단한 시장의 요구에 대응하기 위해 21세기 기업이 갖추어야 할 역량은 무엇일까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수십만의 직원을 거느린 글로벌기업이 역량을 집중하는데 필요한 방법과 그 구성원의 덕목은 무엇일까? 애플은 애플 생태계를 구성하는 개발자의 협력없이 존재할 수 없고, 구글은 세계 곳곳 프로슈머의 협력없이 경쟁할 수 있을까? 지나친 내부경쟁과 독점이 기업의 성장 가능성을 파괴하는 예는 너무도 많다. 지금은 협동 역량을 경쟁해야 하는 시대다. 모르는 사람들과 같은 목표를 나눌 줄 알고, 원거리의 커뮤니케이션에도 쉽게 공감할 줄 아는 사람이 진짜 필요한 사람이다.
규모가 커졌기 때문에 더욱, 21세기형 직무역량과 19세기형 학교의 괴리는 더 커졌다. 그러나, 150년 이상 경쟁만 가르쳐온 학교가 협동을 어떻게 가르쳐야 할까 묻는다면 쉬운 일은 아니다. 30년 가까이 시험만 쳐서 교사가 된 선생님, 교육부에서 내려다 주는 권위적 커리큘럼, 학교와 학교간의 경쟁에 내몰린 교육행정 그리고 경쟁사회의 일원으로 길들여진 학부모를 그대로 두고 협동교육은 작동하기 어렵다. 협동조합학교가 학교 자체의 소유구조, 거버넌스를 바꾸는 시도에까지 나아간 이유가 여기에 있다. 협동조합학교는 학교에 관한 150년 사람들의 상식을 바꾸는 운동이다. 대안학교 설립운동이 아니라 공립학교를 바꾸는 주류운동이다.
"We recognised very early that we needed cooperative ideas and cooperative schools to be in the mainstream not simply on the margins if we were going to make a difference." Mervyn Wilson
우리는 처음부터 협동의 아이디어와 '협동조합학교'를 공교육의 주류로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변화를 만들어내고 싶다면, 단순히 변방의 비주류에 머물러서는 안되는 것이지요. - 머빈 윌슨
머빈 윌슨(Mervyn Wilson)은 맨체스터에 있는 협동조합 대학(Co-operative College)의 전 총장이다. 그는 2008년 맨체스터에 첫 협동조합학교를 설립한 이래, 10년도 안되 무려 843개(2015년 현재)에 이르는 잉글랜드 지역 공립학교의 '협동조합화'를 지원한 영국 협동조합학교의 산증인이다. 그는 협동조합학교 설립 운동은 '경쟁하는 사회, 경쟁하는 교육문화를 싹 뜯어고치자 강변하는 것이 아니라 협동의 가치가 21세기 경제에 필요한 덕목임'을 합리적으로 설득하는 일이라 말한다.
호세 마리아(José María Arizmendiarrieta) 신부가 스페인 몬드라곤 협동조합에 대해 '경제행위를 결합한 교육운동'이라 했듯, 협동조합이 지켜온 가치들은 경제조직으로서 협동조합을 유지하기 위한 원칙이 아니라 더 나은 세계를 위해 시민이 지켜야할 가치관에 가까운 것이었다. 로치데일 협동조합 역시 단순한 식료품 소매사업이 아니라 조합원의 일상 전반에 협동하고 협력하는 문화를 심는 교육활동이고 사회혁신 운동이었다. 영국의 협동조합학교가 커뮤니티와 학교를 잇고 교직원과 학생을 잇는 협치의 거버넌스를 채택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렇게 학교는 협동조합이 되었다. [협동조합은 학교다.]
FILM : [협동조합은 학교다], Co-operative Schools in England
"One phrase that a colleague of mine said about the model when he first saw it he said ‘what you are doing with this is you are putting the community back into community schools’ because we call lots of schools community schools but the community had a very limited opportunity for engagement. We provided a structure model that did that but also seemed to have the potential to last." - Mervyn Wilson
어느 동료가 처음 협동조합학교 모델을 보고 제게 해준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는 “지금 당신이 개발하고 있는 협동조합학교 모델은 커뮤니티학교에 커뮤니티를 돌려주고 있는 거군요”라고 하더군요. 왜냐하면 영국에서는 지자체가 운영하는 공립학교를 통상 커뮤니티학교라고 불러왔거든요. 하지만 정작 그런 커뮤니티 학교의 운영에 지역 공동체가 참여하는 기회는 아주 제한적이었죠. 협동조합학교는 지역공동체를 학교 운영에 참여시켜 지속가능성을 높일 수 있는 학교운영구조를 제공합니다. - 머빈 윌슨
Michael Rossington 13, Lipson Co-operative School. 2015년, 한국에선 초등학교 6학년 나이에 불과한 7학년의 마이클은 1년전 이 학교로 진학하기 전부터 협동조합 학교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고 했다. 그리고 협동조합학교가 품고 있는 핵심 가치는 모두가 차별없이 평등하며 어떠한 특권도 허용하지 않는, 민주주의에 있다고 당당하게 말한다. 영국 전체로 따지면 7%의 아이들이 연간 최소 17,000파운드(약 3천만원)에 이르는 학비를 내는 사립학교를 다닌다. 그 7%의 특권적 아이들 중 마이클의 용기와 자존감을 가지고 있는 아이들이 얼마나 될까?